사랑의 시작은 백지가 아니다
어떤 사랑은, 발자국처럼 남는다.
흙 위를 걷듯 조심스럽게, 그러나 분명히.
비가 오면 지워지는가 싶지만, 마음의 땅은 쉽게 마르지 않아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더욱 또렷해진다.
우리는 사랑을 시작할 때, 흔히 깨끗한 백지 위에 무언가를 쓰는 줄로만 안다.
서로의 세계에 첫 손길을 남기는 줄 알고,
그게 얼마나 아름답고 새로운 일인지에만 마음을 둔다.
하지만 진실은,
우리는 이미 자국투성이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누군가의 웃음이 머물다 간 자리에,
이별의 문장이 각인된 가슴에,
다시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것.
사랑은 자국 위에 쌓여 간다.
흔적을 지우려 애쓰는 일이 아니라,
그 흔적을 이해하고 품는 일이다.
누군가가 사라지고 난 자리에 남는 건 단지 아픔만이 아니다. 그 사람이 내게 준 시선, 말투, 생각, 기다 림, 상처와 회복. 그 모든 것이 스며들어, 나는 예전과는 다른 내가 된다.
어쩌면 연애란,
사람이 사람에게 남긴 자국을
서로 읽어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건 왜 그렇게 반응하는 거야?“라고 묻는 대신
“거기, 누가 먼저 지나갔던 거니?“라고 물을 수 있는 사람.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 자국을 안아주는 사람.
우리는 그런 사람을 기다리는 게 아닐까.
그리고 언젠가는 누군가의 가장 깊은 자국을,
따뜻하게 덮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사랑은 완벽해서 아름다운 게 아니다.
자국이 많아서,
그 자국을 함께 알아가서,
그래서 더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