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의 숙성
좋은 정답보다 잘 다듬고 왜 그토록 오랫동안 고민하고 답을 얻어내지 못했는지 정돈된 물음표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게끔 한다.
우리는 '정답 중독' 사회에 산다. 모르는 게 생기면 3초 안에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한다. 검색창에 질문을 입력하면 0.001초 만에 수백만 개의 답이 쏟아진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유튜브를 켜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위키피디아를 찾는다. 궁금증이 생길 틈을 주지 않는다. 답을 모르는 것은 무능력으로 여겨지고, 빨리 답을 찾는 것이 능력으로 인정받는다. 빠르고 효율적이지만, 남는 게 없다. 쉽게 얻은 답은 편의점 도시락처럼 금방 허기가 진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질문일지도 모른다. 정보가 범람하는 시대에는 많이 아는 것을 넘어서,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선별하는 자세와 동시에 좋은 질문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 좋은 질문 하나가 평범한 답 백 개보다 더 가치 있을 때가 있다. 좋은 질문은 생각의 문을 열고, 상상력을 자극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아인슈타인이 "중력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그는 단순히 답을 찾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가 공간과 시간에 대해 갖고 있던 모든 고정관념을 의심했다. 그의 질문은 물리학의 전체 패러다임을 바꿔놓았다. 소크라테스가 "무지의 지"를 말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는 답을 모른다고 고백함으로써, 진정한 지혜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었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라는 그의 말은 모든 철학적 탐구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런데 좋은 질문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빠르고, 즉각적이고, 효율적이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 속에서 질문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답을 모르면 즉석에서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질문들은 며칠, 몇 달, 때로는 몇 년에 걸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조각가가 대리석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내어 작품을 완성하듯, 오랜 시간 고민하고, 여러 각도에서 검토하고, 불필요한 부분들을 다듬어내어 핵심만 남긴 '정돈된 물음표'이다.
좋은 질문은 검색창에 쳐서 나오지 않는 것들이다. "나는 왜 불안한가?", "어떻게 살아야 후회하지 않을까?" 이런 질문들은 며칠, 몇 달, 때로는 묵은지처럼 몇 년을 묵혀야 맛이 난다. 즉각적인 해결을 멈추고 질문을 뇌 속에 내버려둬라. 그것은 뇌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생각을 연결하고 확장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런 질문들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경계를 넘나든다는 것이다. AI는 의식이 있는가? 라는 질문을 생각해 보자. 이 질문에 답하려면 컴퓨터 과학자만으로는 부족하다. 철학자가 필요하고, 신경과학자가 필요하고, 어쩌면 심리학자와 언어학자도 필요하다. "의식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 없이는 AI의 의식을 논할 수 없고, 뇌의 작동 원리를 모르면 의식의 본질에 접근할 수 없다. 이 질문은 여러 학문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도 마찬가지다. 과학은 관찰과 실험을 통해 지식을 쌓지만,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물음은 철학의 영역이다. 인식론 없이 과학을 하면 방법만 있고 의미가 없다. 과학 없이 인식론을 하면 사변만 있고 검증이 없다. 진짜 깊은 질문은 한 분야에 갇히지 않는다.
좋은 질문은 왜 그토록 오랫동안 고민하고도 답을 얻어내지 못했는지를 솔직하게 보여주는 질문이다. 그런 질문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함께 고민하게 만든다. "나도 그 질문 때문에 밤잠을 설쳤다.", "나도 그것이 궁금했다.", "나도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라고 말하게 만든다. "왜 사과가 아래로 떨어질까?"라는 뉴턴의 질문이 물리학 전체를 바꾸었고,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톨스토이의 질문이 수많은 사람의 인생을 바꾸었다.
좋은 질문은 연결한다. 사람과 사람을, 과거와 현재를, 개인의 고민과 보편적 주제를 연결한다. 그리고 그 연결 속에서 새로운 답들과 새로운 질문들이 태어난다. 결국 질문을 던진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잘 익은 질문 하나는 정답 백 개보다 당신의 인생을 더 멀리 데려간다. 답은 끝이지만, 질문은 시작이다. 답은 마침표지만, 질문은 문을 여는 열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