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er Flowering Plants of Yangjaechen
양재천은 내가 중국에 오기 전 사시사철 틈만 나면 찾던 내 최고의 쉼터였다. 양재천은 한국의 경기도 과천시와 서울 남부를 흐르는 하천으로 길이는 18.5 km에 이른다. 그중 나는 지하철 3호선 라인을 기준으로 양재역 부근부터 학여울역 사이를 즐겨 걷고, 그곳에서 자라는 식물들을 많이 그렸다.
식물을 그린다는 것은 그리는 사람마다 각자 다른 의미를 갖는 일이겠지만, 내가 그리고 싶은 식물은 한순간 카메라에 포착된 멋있고 인상적인 모습이 아닌, 사진만으로는 볼 수 없고 사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식물과 나의 이야기가 담긴 그림이다. 큰 감탄사가 나오는 그림이 아니라 가만히 들여다보게 하는 그림이다.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 식물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주 가는 양재천도 무심히 걷다 보면 대부분의 식물들을 그냥 지나쳐 버리기 십상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조용히 눈에 들어오는 식물들이 있다. 그때가 내 관찰의 시작이고, 그 후론 갈 때마다 계속 신경 써서 살펴보고 인식하게 된다. 내 그림도 그러하면 좋겠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BOYHOOD’는 같은 감독과 제작진, 그리고 같은 배우가 12년의 세월에 걸쳐 함께 촬영하며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한다. 영화를 보며 나도 정다운 친구 같은 식물들의 모습을 오랜 세월에 걸쳐 관찰하고 그림으로 담아보는 그런 작업을 해보고 싶었다. 같은 곳에 한결같이 존재하는 양재천에 변심하지 않고 계속 가기만 하면 되니, 영화를 찍는 일에 비하면 얼마나 쉬운가?
그러나 내가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으니, 그것은 양재천이 늘 깔끔하게 관리 받고 매년 새로운 식물을 심어 단장하는 귀한 신분이라는 점이다. 식물들로 가득하던 곳이 예고 없이 정리될 수 있기 때문에, 휑하게 흙만 남은 땅을 마주할 준비를 늘 해야만 한다. 몇 년간 발품을 팔아 위치를 기억하고 매년 때가 되면 찾아가는 식물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없으면 그야말로 마음에 서늘한 바람이 분다. 그러나 나에게 귀한 들꽃들이 누군가에게는 산책하는데 방해만 되는 관리 안 된 잡초일 뿐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대부분의 들꽃들은 아무리 풀잎 하나 남기지 않고 뿌리까지 파헤쳐도 시간이 지나면 그 자리에 새로이 싹을 틔워 자리 잡는다는 점이다. 강인한 생명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번 작품의 주제는 <양재천의 여름 식물>이다. 이 그림을 그린 동안에도 재미있는 추억들이 한가득이라 사진들을 보자마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양재천은 혼자서 제일 많이 가긴 했지만, 산책도 할 겸 친한 언니와 함께 커피 한 컵씩 손에 들고 자주 걸었던 곳이기도 하다. 내가 잠시 멈춰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도 즐거운 수다는 멈추지 않는다. 나는 그림 그리며 이야기하는 게 너무나 자연스럽고, 고맙게도 나와 함께 자주 산책을 하던 언니는 식물 보느라, 그림 그리느라, 눈도 안 마주치는 나와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여기는 듯하다.
어떤 날은 긴 산책과 긴 수다 끝에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마시며 또다시 대화를 이어가기도 한다. 그 와중에도 채집해 온 식물을 시들게 둘 수는 없기 때문에 '음주 드로잉'은 필수이다.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 식물이나 채집하지는 않는다. 내일 당장 다 뽑혀 정리되어도 하나 이상하지 않은 '관리 대상' 식물들 위주로 채집한다(사실 100% 그런 건 아니기 때문에 '위주로'라는 약간의 여지를 남겨 두는 소심함 ^^;).
야외에서 스케치를 한다는 건 사실 약간의 용기를 필요로 한다. 기록하고 싶은 식물이 있는 곳이 스케치 장소가 되기 때문에 열악한 환경을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간혹 한참을 쳐다보고 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럴 땐 좀 잘 그리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만, 내 손은 이런 내 맘도 몰라주고 오히려 잔뜩 경직돼서 실수를 연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상 앞에서는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생생한 장면들과 오감을 자극하는 현장만의 분위기가 있다. 그게 바로 현장 스케치의 묘미이다.
많고 많은 식물 중 하나의 작품에 담을 몇 가지 식물을 선택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고민 끝에 최종적으로 선택한 식물은 개망초(Daisy Fleabane), 며느리밑씻개(Prickled-vine smartweed), 며느리배꼽(Asian tearthumb), 메꽃(Short-hairy morning glory), 그리고 괭이사초(Nerved-fruit sedge)이다.
첫 채색은 메꽃(Short-hairy morning glory)으로 시작했다. 이 그림을 그리기 전만 해도 메꽃, 애기메꽃, 큰메꽃을 잘 구분하지 못했다. 그나마 메꽃은 잎모양이 아주 다르게 생겨 금방 구분이 가능했지만, 애기메꽃과 큰메꽃은 둘 다 잎의 양쪽 밑부분이 2개로 갈라지는 모양이라 내가 직접 찍은 사진을 보고도 제대로 정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양재천에서 메꽃 종류를 만날 때마다 식물도감과 비교하며 직접 살펴보니, 설명대로 애기메꽃에는 꽃자루에 날개가 있고 큰메꽃에는 날개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애기메꽃은 작고 큰메꽃은 컸다! 관심을 가지고 주의를 기울이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메꽃과 애기메꽃 잎모양의 차이는 내가 그린 애기메꽃 그림(일부)의 잎을 보면 쉽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메꽃 다음은 며느리밑씻개(Prickled-vine smartweed)와 며느리배꼽(Asian tearthumb) 차례이다. 둘 다 마디풀과 여뀌속 식물이고 이름도 생김새도 비슷하다. 며느리배꼽은 큰 턱잎을 가지고 있는데, 그 동그란 생김새가 배꼽 같아서 며느리배꼽이라 한다. ‘며느리’가 포함된 식물 이름은 대체로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마 이 두 식물도 줄기, 잎 등에 빽빽하게 난 가시가 있어 이런 이름이 붙은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다.
며느리밑씻개 꽃(왼쪽 위)은 같은 여뀌속 식물인 고마리 꽃을 닮았지만 좀 더 소박하게 생겼고, 며느리배꼽 꽃(오른쪽 아래) 역시 이 둘을 닮았으나 더더욱 소박하다. 며느리배꼽 꽃은 정말 눈을 씻고 또 씻고 찾아야 겨우 보인다.
며느리배꼽과 며느리밑씻개를 완성하고 나니 전체 그림의 대략적인 이미지가 그려지는 듯하다. 그리고 이 식물들이 자라는 곳의 환경도 함께 보여주기 위해 그림 한편에 양재천 주변의 식물이 자라는 모습을 간단히 스케치하기로 했다.
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나는 며느리배꼽을 필연적으로 다시 그리게 될 것이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냥 너무 좋았다! 보일 듯 말 듯 수줍게 피어나는 꽃도 좋았고, 가느다랗고 약한 줄기가 무언가를 꽉 붙잡지도 못하고 힘겹게 기대고 서로 얽혀가면서도 길게 길게 뻗어가는 모습도 대견했다. 온통 가시로 뒤덮여 한껏 날을 세운 모습에는 연민의 감정마저 느꼈던 것 같다. 심지어 뿌리를 살펴보려다 복잡하게 엉킨 가시덤불에 상처만 잔뜩 입고 후퇴하고 말았는데, 그래도 마냥 좋았다. 그중에서도 시시각각 변해가는, 어쩜 가시가 가득한 몸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아름답고 동글동글한 열매가 내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다음 해, 나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며느리배꼽을 꾸준히 관찰하고 정성껏 그림을 그렸다.
괭이사초(Nerved-fruit sedge) 차례이다. 양재천에는 사초과 식물들이 많아서 그림에 하나 넣고 싶었다. 그러나 솔직히 사초과 식물들의 이름을 잘 알지 못하고, 또 이 그림에 담기에는 대부분 식물들이 너무 컸다. 그렇게 하나씩 제외하다 보니 괭이사초가 남았다. 최선의 선택이라기보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그리게 된 식물인데, 운 좋게도 다른 식물들과 썩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내심 만족스러웠다.
마지막은 개망초(Daisy Fleabane)이다. 개망초는 양재천변 지천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양재천 대표 들꽃 중 하나이고, 평소 내가 좋아하는 꽃이라 꼭 그리고 싶었다. 계란을 닮아 계란꽃이라고도 부르지만, 진짜 계란을 닮았다면 내가 이렇게 좋아하진 않았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 꽃은 메추리알을 닮아 귀엽다. 나는 귀여운 꽃을 참 좋아한다.
완성한 그림을 보면 참 간단하다.
난 이 간단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 해 여름,
애기똥풀, 마, 토끼풀, 큰금계국, 끈끈이대나물, 개구리자리, 환삼덩굴, 석잠풀, 개소시랑개비, 질경이, 털별꽃아재비, 쥐방울덩굴, 소리쟁이, 수영, 꽃다지, 별꽃, 고마리, 큰개불알풀, 꽃마리, 주름잎, 살갈퀴, 지칭개, 말냉이, 긴병꽃풀, 새모래덩굴, 익모초, 박주가리, 쇠무릎, 개똥쑥, 개망초 등 이런 아름다운 꽃들의 이름을 마음껏 불러보았다.
그리고 이것보다 훨씬 많고 많은 식물들의 이름을 궁금해하며 다음을 약속했다.
그렇게 뜨겁고 신나는 여름을 보냈다.
김지영 作
양재천의 여름 식물
Summer Flowering Plants of Yangjaecheon Stream
-개망초 Erigeron annuus (L.) Pers.
-며느리밑씻개 Persicaria senticosa (Meisn.) H.Gross ex Nakai
-며느리배꼽 Persicaria perfoliata (L.) H.Gross
-메꽃 Calystegia sepium var. japonicum (Choisy) Makino
-괭이사초 Carex neurocarpa Maxim.
Watercolor
297×420m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