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핏 외래어와도 같은 히어리는 순수한 우리말 이름으로 학명에 ‘coreana’라는 종명이 붙은 우리나라 특산식물이다.
특산식물이란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만 분포하는 식물을 말하는데, 특정한 지리적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온 만큼, 자생지가 줄어든다거나 개체수가 귀해지는 종들이 대부분이라 모두의 관심과 유지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특히 요즘 같은 전 세계적 기후위기에 생물 다양성의 유지가 당면 과제로 대두되고 있는 점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얼마 전 외래식물종인 갯끈풀과 가시박에 대한 다큐멘터리에서 이들이 어떻게 우리 고유의 생물다양성을 교란시키고 망가뜨리는지 보고 그 심각성을 진심으로 느끼게 되었다.
우리나라 환경에 우연히 뿌리내리고 자라나는 가시박 덩굴은 모든 식물을 덮어버려 햇빛을 차단하고, 한 포기에서만도 수만 개의 씨앗을 떨구어, 처음에는 공존하는 듯했던 풀들과 나무까지도 2~3년이면 말라서 죽게 된다고 한다.
땅 위에 존재하던 다양한 토종 식물들이 거의 사라지고 가시박만이 살아남게 된다. 문제는 다양한 토종 식물들을 먹이로 삼아 살아가던 곤충들과 상위 먹이사슬의 생물들은 토종 식물이 사라짐에 따라 같이 개체수가 줄어들 수밖에 없고, 식물종의 다양성 감소는 그 상위의 동물종의 다양성 감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더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임에도 생물종 다양성과 멸종의 의미가 갑자기 크게 느껴지게 되었다.
이름도 예쁜 히어리는 우리나라 고유의 특산식물로, 초기에 멸종 위기종으로 지정되어 보호되었었는데 자생지가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개체수도 충분히 확인되어 지정이 해제되었다고 한다.
내가 처음 만난 히어리는 열매가 먼저였다. 5월 봄꽃이 한창인 식물원에서는 더듬이가 달린 듯 동글동글한 모양으로 매달린 초록 열매가 이미 여물어 가는 중이었고, 느릿느릿한 나는 언제나 꽃 시기를 놓치고 있었다.
벚꽃이 소식을 전하는 3월에 찾아간 성남시 식물원에서 드디어 만개한 히어리 꽃을 만날 수 있었다.
성남시 식물원은 언덕 위에 남쪽 면으로 경사면을 두고 층층이 예쁜 꽃들을 심어두었는데, 그 사이사이에 히어리가 여러 그루 군락을 지어 자리를 잡고 있다.
아직 꽃을 보기엔 좀 이른 쌀쌀한 날씨였지만 햇살 가득한 언덕에 한가득 피어난 연노랑 히어리 꽃이라니! 게다가 사이사이엔 지난가을에 씨앗을 떨구고 남은 열매가 그대로 달려있었다.
꽃 관찰 시기를 놓칠까 싶어 그전에 관악산 둘레길에서 봐두었던 히어리를 찾아갔다.
산자락이라서 그런지 식물원보다 일주일쯤 늦게 꽃이 피었다.
역시 야생 상태에서 다른 식물과 경쟁하느라 나무의 키도 크고 꽃 색도 더 투명한 듯 연한 색이었다.
원추꽃차례로 늘어지며 달리는 종모양의 꽃이 작기도 하고 여러 송이가 겹쳐져 있어 세부적인 관찰이 필요했다.
전체 모양을 스케치하고 다시 꽃잎과 덮개들을 하나하나 분해해 가며 대략적인 치수와 모양을 스케치해 두었다.
손으로 기록하고 기억해 두지 않으면 스케치와 채색 단계에서 오류를 범하기 쉽다.
꽃이 모두 지고 이제 열매를 기다리며 몇 달을 보냈다.
히어리의 잎은 둥근 하트 모양에 깊고 명확한 잎맥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 잎 자체로도 꽤나 멋진 소재가 될 듯하다.
더군다나 5월의 초록초록 여린 잎은 꽃만큼이나 예쁘다.
히어리의 가을잎은 너도나도 깊은 색으로 물들어 가고, 열매는 짙은 갈색으로 단단히 여물어 간다.
색색이 물들어가는 히어리의 가을 모습을 가득 그려볼 계획으로, 틈틈이 잎 모양과 가지, 열매의 특징을 스케치해 두었다.
익은 열매들이 말라가며 품고 있던 씨앗들을 튕겨내었다.
밑그림 스케치는 화사하게 노란색으로 물든 가을잎과 열매를 뒷면에 넓게 배치하고 하단 앞부분에 작은 꽃가지 하나와 5월의 파릇한 잎과 열매를 배치하기로 하였다.
구도와 구성을 결정할 때 보통은 각자 따로 스케치하여 각도와 겹침을 고려하여 완성하는데, 이번 히어리 작품은 어찌하다 보니 전체 구성을 결정하여 한 번에 스케치하게 되었다.
스케치한 버전이 그대로 마음에 들어서 매달린 열매를 더 추가하여 보완하고, 우측에 수피를 보여 줄 굵은 가지를 그려 넣어 마무리하기로 하였다.
밑그림을 화지에 옮기고 이제 드디어 채색에 들어가려니, 오랜만의 색연필 작업에 기대감이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나는 파버카스텔 알버트뒤러 전문가용 수채색연필 72색을 주로 사용하는데, 여기에 없는 색상의 색연필은 필요한 경우 낱개로 구입하여 사용하고 있다.
최근엔 수채화 작업이 대부분이어서 색연필을 사각거리며 그림을 그렸던 것이 언제인가 싶게 새롭다.
전반적으로 노란빛을 띠고 있는 가을잎은 185 Naples yellow와 104 Light yellow glaze를 기본 색으로 잡고, 중심부는 170 May green, 뻗어 나오는 잎맥은 188 Sanguine으로 형태와 음영을 잡아주었다.
히어리의 잎은 뚜렷한 잎맥이 특징으로 앞면의 주름을 명확하고 자연스럽게 강화해 가며 채색하면 된다.
잎 끝쪽에 267 Pine green의 짙은 녹색으로 명확한 무늬를 만들어주기도 하고, 184 Dark naples ochre나 180 Raw umber, 283 Burnt siena를 추가하여 더 깊은 색으로 물든 노란 잎으로 만들어주었다.
히어리의 꽃은 노랗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연약하고 투명한 노랑연두의 얇은 포로 여러 겹 덮여 있어 색연필로 그 얇고 투명한 느낌을 표현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작은 꽃 크기에 더 작은 꽃잎을 표현하려다 보면 어느새 과해지거나 두꺼워져서 자주 수정해 가며 조심스럽게 채색해야만 했다.
꽃 위의 포는 170 May green으로 밝은 연둣빛을 주고 102 Cream으로 살살 펴주었고, 매달린 꽃송이 사이사이의 음영진 부분은 173 Olive green yellowish를 사용하였다.
종모양 꽃 아래로 살짝 드러나는 꽃밥은 의외로 짙은 색을 띠고 있어 283 Burnt siena로 모양을 그려주고, 전체를 완성한 후 균형을 보아가며 더 짙게 채색을 추가하기도 하였다.
꽃의 배경에 잎이 자리 잡은 경우는 꽃을 어느 정도 채색한 후 잎을 먼저 채색하여 명암과 대비의 정도를 체크해 가며 앞에 드러나는 꽃이 잘 부각될 수 있도록 하였다.
열매는 가을에 나무에 달려있는 형태도 그러했지만, 덜 익은 것부터 완전히 익은 것, 씨앗을 이미 떨구고 말라버린 것까지 다양한 단계를 한꺼번에 표현해야 했다.
암술대가 자라 더듬이가 달린 것 같은 복잡한 구조에 차례차례 엇갈려가며 늘어져 매달리기 때문에 앞과 옆, 뒷모습뿐만 아니라, 제대로 성숙하지 못한 모습까지 자연스럽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열매 구조의 이해가 필수적이다.
구조의 복잡성 때문에 사진자료를 다시 해석하고 밑그림을 색연필로 다시 보완해 가며 채색하여야 했는데, 스케치 단계에서 여러 번 그려보고 기록해 둔 자료가 도움이 되었다.
초록 초록하던 열매는 점차 꽃이 핀 순서에 따라 올리브그린, 짙은 노랑, 오렌지, 자주, 보라색으로 변화무쌍한 색을 띠다가 짙고 붉은 갈색으로 마른 후 씨앗을 털어내고 간혹 그다음 해까지 가지에 남아있게 된다.
이번 히어리 작품은 노랗게 물든 가을 나무에 혹해서 메인 주제를 노랗게 물든 가을 잎과 나무로 잡았지만, 봄철의 야리야리한 잎과 열매도 너무나 매력 있어서 나중에 혹시 잎만 모아서 그리게 된다면 꼭 그려 넣고 싶다.
하트모양의 둥근 잎 모양도 그렇지만 명확한 규칙을 가진 잎맥과 올록볼록 자연스러운 굴곡, 아래로 뻗은 잎 끝의 뾰족한 거치까지 예쁘지 않은 구석이 없다.
밑그림과 채색 과정은 이번 겨울에 진행되었지만, 한 장의 그림에 담아내기 위해 봄날의 꽃과 여름날의 파릇한 열매, 가을날의 낙엽과 씨앗에 이르기까지, 히어리와 함께한 2022년 한 해가 나만의 작은 프로젝트를 완성한 것처럼 소중하게 다가온다.
오랜만의 색연필 작업 또한 매우 즐거웠지만, 레이어를 올리며 연필을 더욱 꽉 잡고 압력을 주어 블렌딩 하다 보니 손가락이 아파져서 한동안은 수채화로 돌아가 작업할 예정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이 고통은 곧 까마득히 잊히고 새봄이 오듯 다시 색연필로 작업하고픈 마음이 새싹처럼 움트리라는 것을…….
최지연 作
히어리 Korean winter hazel
Corylopsis coreana Uyeki
수채색연필
364 X 515m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