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이 색색으로 물들어 가는 가을이 되면 빨갛게 익어 가는 꽃사과나무 열매가 이리 오라고 손짓을 한다. 열매가 가장 예쁜 시기는 9월에서 10월인데, 아파트 단지나 공원에서 쉽게 만날 수 있어 산책 중 자동으로 카메라를 들이대게 되는 마법을 부린다.
늦가을인 11월에 접어들면 노랗게 물든 잎들이 모두 떨어져 버리고 무르익은 빨간 꽃사과나무 열매가 더욱 존재감을 드러내며 다가온 겨울을 알린다.
꽃사과나무 열매 작품은 지난 2020년 9월에 작업하였던 것인데, 이번 올랑보아진 가을호에 싣기로 결정하고 나서 벨룸지에 작업하였던 수채 채색의 경험을 조금이나마 공유하기로 마음먹었다.
보타니컬아트 수채작품은 대부분 결이 고운 세목(Hot pressed) 종이에 그리는데, 벨룸은 구하기도 쉽지 않고 다들 한 번쯤 시도하고 싶어 하기는 해도 막상 실행이 어려운 재료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의 경험을 소개하는 김에 조금 더 체계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조사하던 중, Katherine Tyrrell의 웹사이트 (www.botanicalartandartists.com)에서 아주 상세하고 유용한 내용을 발견하여 일부를 참고하여 정리해 보기로 한다.
벨룸 구매 시 업체에서 전달받았던 벨룸 종류와 사진 왼쪽부터
①Standard sheepskin parchment
②Manuscript vellum(Finish03)
③Classic calf vellum
④Honey classic calf vellum
⑤Natural calf vellum
우측으로 갈수록 색도 얼룩도 진해지고 표면의 무늬가 강하게 드러난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양피지라고 불리는 벨룸(Vellum)은 오래전부터 보타니컬아티스트들에 의해 즐겨 사용되어 왔는데, 엄밀히 말해 양가죽으로 만드는 파치먼트(Parchment)와 송아지가죽으로 만드는 벨룸(Vellum)으로 구분된다고 한다. 벨룸은 송아지가죽 외에 염소나 양, 사슴 등의 가죽으로 만들기도 하는데 송아지가죽이 보편적이다.
둘의 제작 과정은 동일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존재하며, 파치먼트는 캘리그래피나 법률 문서 등의 기록과 보존에 주로 활용되어 왔고, 벨룸은 예술적 가치가 높은 보타니컬아트와 채색필사본 등에 사용되어 왔다.
사실 벨룸을 웹사이트에서 상품 검색하면 브리스톨(Bristol) 등에서 나오는 그냥 종이(벨룸과 같이 반투명하고 매끈한 느낌을 주는 기름종이) 블록만 검색되어 처음에는 혼란스럽기도 했었다.
벨룸은 자연사하거나 육류 공급체인의 부산물로 나오는 송아지가죽만을 사용하여 제작되며, 표면에 상처가 있거나 얼룩이 있는 경우 사용할 수 없고, 제작 과정 또한 예전 방식 그대로 모두 사람 손을 거쳐 제작되기에 매우 귀하고 비싼 재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타니컬아트 재료로서의 벨룸의 매력은 엄청나서 모두가 한 번쯤 시도해 볼 만한 것이었는데, 내가 느낀 매력은 수채화의 투명함이 반투명하고 은은한 우유빛깔 크림색의 벨룸지 위에서 더욱 독특하고 밀도 높은 색감으로 표현되고, 특히 반짝거리는 표면을 지닌 대상을 그릴 경우 부드러운 광채 효과가 극대화되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책이나 프린트가 아니라 원화를 감상할 때 극명하게 잘 드러난다.
16세기부터 Albrecht Dürer 나 Maria Sibylla Merian, Pierre-Joseph Redouté 등 너무나도 유명한 작가들이 벨룸을 즐겨 사용하였다.
내가 좋아하는 Rory McEwen작가의 경우 특히 벨룸지에 그린 작품이 많은데 부드럽고 크리미 한 벨룸 위에 자연스러운 광채와 빛이 투영되는 튤립과 잎 시리즈는 대체 불가능한 매력이 있다. 반투명의 부드러운 벨룸 위에 투명한 수채물감을 쌓아 식물 특유의 다양한 색을 깊이 있게 드러내는 작품들이 잔잔한 감동을 준다.
Katherine의 웹사이트는 벨룸 제작과정과 특성 등에 대하여 방대하고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
그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벨룸을 주문하고 선택하는데 필요한 사항들이니, 대략적으로 사용되는 종류를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1. Calf vellum: 두꺼운 편이고 덜 투명하다. 파치먼트에 비하면 조금 두꺼운 편이나 크리미 한 표면에 정맥과 같은 vein이 드러나기도 한다. 부드러운 한쪽 면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앞면이 체크되어 배송되는데, 더 부드럽고 매끈한 쪽(피부 바깥쪽)을 사용하는 것이며, 그림을 그리려면 부드러운 천에 경석(pumice) 가루를 묻혀 섬세하게 닦아주는 등의 방법으로 표면의 기름기를 제거해 주어야 한다.
2. Calfskin manuscript vellum: 서적 등에 사용할 수 있도록 양면처리 되어있다. 표면이 가장 고운 1단계부터 거친 4단계까지 나누어지는데, 보타니컬페인팅에는 아무래도 1단계가 적합하겠다.
3. Classic vellum: 표면이 탈색된 Calf vellum
4. Natural vellum: 표면이 탈색되지 않은 Calf vellum. 내추럴한 색이 그대로 남아있기에 누런색이나 밝은 갈색 등을 띄는데, 더 투명하면서 광택이 있다. 색이 짙을 뿐만 아니라 표면의 vein이나 모공과 같은 피부느낌이 더 명확히 드러나기에 보타니컬페인팅에는 호불호가 있겠다. 내추럴 벨룸을 선호하는 작가들의 이유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패턴의 종이에 세상 유일한 그림을 그려내는 만족감도 있고, 내추럴한 바탕색과 무늬의 배경에 그려지는 식물그림이 하얀 순백색의 종이배경에 그려지는 것보다 더 자연에 가까운 느낌을 주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5. Kelmscott finest vellum: 영국의 William Cowley & Sons. 에서 생산하는 Calf vellum으로 특별한 오가닉 코팅으로 표면 처리한 것이다. 내추럴한 피부흔적이 덜 드러나 표면이 밝으면서도 부드러운 벨룸의 특징을 그대로 유지하여 보타니컬페인팅에 매우 적합하다.
심지어 두껍기도 해서 어느 정도 수정도 가능하기에, 나같이 벨룸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보타니컬아티스트들에게 추천한다. 코팅된 표면은 매우 부드럽고 하얀 초크가루 같은 것이 묻어 있어 작업 전 부드러운 천으로 살살 문질러 털어내주었다.
다시 말하지만 우유빛깔의 부드러운 크림색은 사진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아 실제로 눈앞에서 볼 때에만 그 특징을 제대로 알 수 있다.
나는 벨룸을 처음 시도하는 만큼 다른 종류도 시도해 보고 싶어서 Manuscript calf vellum도 구입하여 연습과정에서 사용해 보았는데, 역시 두께에서 오는 크리미 한 색깔과, 피부 특유의 패턴이 덜 드러나는 Kelmscott vellum이 작업하기에 용이했다.
벨룸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마음에 드는 재료를 선택하였다면, 이제 작품을 그리는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문제들은 살펴보자.
나는 The American Society of Botanical Artists (ASBA)에서 발행한 Botanical art techniques를 참고하여 매우 상세한 가이드를 얻을 수 있었다.
연습이 필요한 부분부터 실제 작품 시작에서 마칠 때까지의 필요한 과정을 사진과 함께 구체적으로 예시하고 있어 벨룸을 처음 시도하는 분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내가 벨룸지에 꽃사과나무 열매를 그리면서 발견한 특징들과 유의점을 정리해 보면 ;
1. 굴곡지고 굽이진 가죽을 평평하게 당기고 펴서 말려놓았으니 당연한 특성이겠지만, 공기 중에서 쉽게 휘어지고 뒤틀려 결과적으로 벨룸을 작업할 나무판에 고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충 마스킹 테이프로 붙여놓았더니 끈적하게 테이프 이물로 오염되거나, 양 끝이 휘어지는 힘에 매일 아침 테이프가 떨어져 있는 벨룸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사용하지 않는 뒷면을 rabbit-skin glue나 다용도 목공풀(단 acid free이어야 함) 같은 것으로 고정하는 방법이 사용된다고 하는데 시도해보지는 않았다. 아마 벨룸의 크기가 크거나 두께가 얇으면 더욱 심각한 문제일 수밖에 없겠지만, 나는 초심자로서 작고 두꺼운 벨룸(6X8인치, Kelmscott)으로 시작했기에 대충 나무판 위에 올려놓고 작업하였다. 다만 고정하지 않음으로써 벨룸을 자꾸 손으로 만지게 되는 문제(나중에 손의 기름자국이 남는다든가)나 전체적으로 휘어지는 문제는 어쩔 수 없이 감내하고, 대신 완성 후 무거운 책과 나무 판 사이에 눌러놓아 평평하게 펴주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2. 밑그림을 종이에 완성하고 벨룸에 옮기기 위해 기존 수채화나 색연필화와 동일한 방법으로 하였더니 스케치 뒷면을 연필로 먹지를 만들어 옮기는 과정에서 여분의 연필가루가 벨룸에 묻어 지저분해지는 문제가 있었다. 연필 가루가 벨룸 표면에 묻고 나면 가루가 번져서 깨끗한 지우개로도 점점 지저분해지기 때문에 (퍼티지우개로 완전히 지우거나 부드러운 사포로 표면을 갈아내지 않는 한) 연필 밑그림의 양은 최소화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내가 사용한 방법은 트레이싱지에 옮긴 밑그림선을 뒷면에서 연필로 똑같이 한 번 그리고, 이 트레이싱지를 벨룸에 올려놓고 다시 한번 그려주는 것이다. 아주 번거롭기는 하지만 떨어지는 연필가루의 양을 최소화할 수 있다. 다른 작가들의 경우는 벨룸에 직접 연필 또는 수채화 붓을 이용해 대략적인 스케치를 하거나 라이트박스를 이용하기도 한다.
3. 물을 담은 수채 채색을 해야 하는 만큼 벨룸의 수분 흡수 특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공기 중의 습도에도 울어버리는 정도이니 채색은 무조건 dry brush, 마른 붓질이 정답이다. 나는 처음 옅은 레이어의 색을 입힐 때 물감의 양을 최소로 하여 물을 조금 많이 사용하였는데 벨룸이 생각보다 물을 잘 흡수하지만, 겉으로는 마른 듯 보여도 완전히 마르는 데는 꽤 오래 걸렸다. 덜 마른 상태에서는 먼저 채색한 부분이 소량의 물로도 쉽게 닦여버리기 때문에 위에 다른 색을 겹쳐 올릴 수 없고 색이 뭉쳐지기 때문에, 완전히 말려가며 천천히 작업할 수밖에 없다. 붓에 조금만 물기가 많아도 붓질을 멈춘 끝에 물감이 고여버리고, 물이 벨룸에 흡수된 정도만큼 표면이 울퉁불퉁 해진다고 보면 된다.
4. 물 사용이 최소화되어야 하는 만큼 붓은 세필붓을 사용하는 것이 좋고 채색 레이어에 부드럽게 계속 색을 올리려면 뻣뻣한 합성모에 비해 붓끝이 부드럽고 탄력 있는 천연모로 된 붓을 사용하여야 한다. (물론 완전히 닦아내기를 할 때는 힘 있는 합성모가 좋다.)
벨룸 작업 시의 수정은 깨끗한 붓으로 닦아내는 방법을 사용한다. 하지만 수채물감이 바깥쪽으로 밀려가면서 외곽선에 물감이 뭉쳐지기도 하고 완전히 물이 들어버린 경우는 깨끗이 닦아내기도 힘들다.
위의 사진은 외곽에 뭉친 물감을 물로 닦아내다 보니 원래 그림의 윤곽보다 바깥까지 물을 흡수한 자국이 생겨버리고 말았다.
붓으로 닦아내기는 한계가 있는 만큼, 완전히 말린 뒤 날카로운 칼을 세워서 살살 긁어내는 방법으로 (한 겹 긁어서 벗겨내듯이) 벨룸을 미세하게 갈아내고, 반질반질하고 매끈한 돌이나 도자기 조각 같이 둥근 물체로 문질러 눌러주는 방법을 사용하면 어느 정도 실수한 흔적을 없앨 수 있다.
말로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각자의 경험에 따라 다른 해결 방법을 찾아낼 수도 있으니, 본격적으로 작업하기 전 가능한 한 작은 벨룸 조각에라도 다양한 연습과정을 거치는 것이 좋다.
나의 경험에 따르면 단순한 색을 밀도 있게 올리기는 쉽지만 다양한 색을 겹쳐 올리려면 하나하나 점을 찍듯이 더욱 조심스럽게 접근하여야 하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드디어 밑그림을 완성하고 채색을 시작하였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열매 표면이 만족스럽게 표현되었다.
기초 색은 매우 옅은 색으로 굴곡과 음영의 위치를 잡아주면서, 한 알 한 알 색을 올렸다.
물이 많으면 물감이 벗겨지거나 밀려 나가므로 한 번의 터치도 조심스럽게 천천히 하여야 한다.
빛이 열매 표면에 닿는 영역을 넓게 잡아 비워두고 옅은 색부터 점차 색을 올린다.
겹쳐져 음영이 지는 부분과 가장 어두운 부분, 반사광으로 다시 밝아지는 부분을 유념하여 채색하였다.
잎은 앞뒷면의 색 차이를 명확하게 잡고, 잎맥이 돌출된 뒷면은 잎맥의 음영도 전체 빛 방향과 일치시켜 채색하였다.
완성하고 보니 탐스러운 꽃사과나무 열매가 꽤 마음에 들게 되었다. 벨룸이 가진 은은하고 따뜻한 배경의 색감이 열매의 광택을 더욱 반짝이게 하고 전체적으로 따뜻한 느낌으로 만들어 주는 듯하다.
아직 큰 사이즈의 벨룸이 두 장이나 남아있기에, 어떤 소재를 그려볼지 과연 잘 그려 낼 수 있을지 이리저리 계획을 궁리하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최지연 作
꽃사과나무 열매 Showy crabapple
벨룸에 수채 Watercolor on vellum
150X200m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