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월출산 종주

by 소울메이트

"한국에 온지 1년이 넘는데 엄마아빠랑 여행 한번을 제대로 못갔어..."

요근래 남편이 달고 살았던 말이다.

남편은 우리 엄마아빠를 너무 좋아한다. 내가 엄마아빠랑 전화할 때마다 옆에서 "언제 같이 놀러갈 수 있는지 여쭤봐." 라며 조르기 일쑤였다.

그랬던 남편의 소원을 드디어 풀게 되었다. 구정을 맞아 다함께 목포 여행 겸 월출산 등산을 하기로 한 것이다. 남편은 연휴를 함께 보내게 되어 너무 좋다며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그리고 또 한명의 아이처럼 신나보이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엄마다.


등산 전날 저녁, 목포에 잡은 숙소의 우리 방에서는 내일 몇시부터 어느 코스로 등산을 할지 토의가 벌어졌다. 엄마가 말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시작해가지고 도갑사쪽으로 내려올까?"

그러니까 지금 최장코스로 가고 싶다는 말씀이다. 천황탐방지원센터에서 시작하여 구름다리와 천황봉을 찍고 구정봉을 지나 도갑사로 내려오는, 월출산 종주코스다. 엄마는 산에 갈 때면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옆에서 보면 벌써 정상을 몇번은 오르내릴 준비가 된 듯한 안광이 뿜어져 나와 조금 무서울 정도다.

내가 생각했던 건 이게 아닌데.. 가장 짧은 길로 휘리릭 끝낼 생각이었건만. 어쨌든 등산은 시간을 여유롭게 잡고 하는 것이 무조건 좋으므로 아침에 늦어도 8시반까지는 일어나기로 하고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약속한 시간에 일어나 간단히 아침을 먹고 1시간쯤 차를 달려 천황탐방지원센터 주차장에 도착했다.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 발걸음을 천천히 하여 산행을 시작한다.

월출산은 결코 만만치 않은 산이라고 익히 들어서인지 괜스레 더 숨이 차는 느낌이었다. 엄마는 대학시절 친구들과 등산을 즐겨 했는데, 한번은 등산 중 비가 내리는 데다 길을 잃어 한 장소만 뺑뺑 돌다 하마터면 산에 갇힐 뻔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 아찔한 기억의 장소가 바로 월출산이다. 당시에는 계단도 지금처럼 잘 되어있지 않아 바위를 생으로 타면서 등산을 했다는데 그에 비하면 지금의 등산로는 잘 닦인 포장도로인 셈이었다.

그나저나 우리가 등산만 한다고 하면 '뭐하러 사서 고생하냐'며 산과는 담을 쌓은 듯 보였던 아빠가 오늘은 저만치 앞서가며 리의 눈을 의심케 했다. 역시 년에 수색대에서 훈련을 받으셨던 저력인 것인가 싶었다.

"아빠 등산 싫어하시는 거 다 뻥이었나봐.." 남편이 놀란 표정으로 속삭였다. 우리 모두 속았구만. 속았어.

가다보니 구름다리로 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동절기에는 안전을 위해 구름다리부터 천황봉 사이는 등산로를 폐쇄하기 때문에 천황봉까지 오르려면 바람폭포 쪽으로 가야만 했다. 름다리를 갈까 말까 잠깐 고민되었는데, 저 위에 바위들 사이로 아득히 보이는 다리를 올려다보니 저걸 건너지 않으면 후회가 남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렇게 와 남편은 구름다리로 향했고 아빠는 도가니가 아프다시며 엄마랑 같이 폭포에서 잠깐 쉬면서 우릴 기다려주시기로 했다.

구름다리로 가는 길은 가파른 계단의 연속이다. 다 오를 때쯤엔 장딴지에 탱글탱글 알이 박인다. 숨을 고르며 드디어 다리에 올라섰다.

"와아!"

다리 위에서 보는 장엄한 암산의 풍경 단전에서부터 감탄 터져 나다. 설악산 울산바위에서 보았던 암산은 발 아래 펼쳐진 수많은 바위를 내려다보며 숨이 탁 트이는 느낌이었다면, 월출산 구름다리에서 보는 바위는 뭐랄까.. 바로 눈대한 병정들처럼 빽히 솟아 있는 바위산이 개미만큼 작아진 우리를 굽어보는 듯해 도 모르게 숨죽이게 되는 느낌이다.



다시 바람폭포로 돌아와 엄마아빠와 정상으로의 산행을 계속했다. 오르면 오를수록 더 멀리 더 널리 시야가 확장된다. 우리가 지나온 구름다리는 이미 작아져 장난감처럼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정상에 다다랐다.


옛날 병풍 속 그림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정상에 올라야지만 볼 수 있는 로 이 풍경을 보기 위해 우리는 계속 산을 오르게 되는 것 같다.


결국 우리는 도갑사쪽으로 하산하여 월출산 종주를 끝마쳤다. 등산시간 자체는 길었지만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최단코스로 가파른 내리막을 되짚어 하산했다가는 정말로 도가니가 남아나지 않았을 거다.


월출산. 지리산보다 힘들었냐 하면 그건 아니었지만, 그에 못지 않은 체력을 요하는 산이었다. 중간중간 엄마아빠와 농담도 주고받고 장난도 치며 흥을 돋우지 않았더라면 아마 훨씬 힘들었을 거다. 유쾌한 두분 덕에 편도 나도 신명나게 산을 넘을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지치면 말수가 급격히 줄어드는 탓에 지리산에서 남편과 둘이 산을 탈 때엔 내려오는 길에 점점 대화가 없어졌었다. 침묵이 길어지면 오히려 몸의 고통에 집중하게 되어서 피로가 극대화는 법이다. 그래서 더 힘들지 않았었나 싶다. 근데 이번에는 엄마아빠와 남편과 함께 웃고 떠드는 사이 근육통은 잠시 잊어버렸다. 인생도 이렇게 엄마아빠처럼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힘들 때는 웃음을 더해서 말이다.


그날 잠들기 전까지 남편은 정말 좋은 하루였다고 거듭 말했다. 아빠는 무릎이 많이 아프지 않고 등산을 끝냈다는 사실에 뿌듯해 보였다. 엄마는 해만 떨어지지 않았다면 반나절은 더 산을 탈 수 있을 것처럼 쌩쌩해보였다. 엄마의 다리 힘의 한계는 어디일까 궁금해진다.. 하긴 지리산을 새벽부터 15시간 등산하고도 근육통 하나 없었던 두 다리인데 월출산 정도는 떡없는 게 당연할지도..

나는 엄마와 달리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엄마아빠가 나보다 다리가 더 튼튼하다는 게 기뻤고(반성할 일이려나..) 이번 여행을 모두가 즐거워했기에 기뻤다.

쩌다 보니 넘게 된 월출산. 다음엔 어떤 산을 넘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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