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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울메이트 Apr 04. 2024

뜻대로 되지만은 않는 게 여행이다

그렇게 시작한 첫 혼자 여행.  

먼 과거인 데다 왜 그랬는지 일기도 써 놓은 게 거의 없어서 시간 순으로 여행기를 쓰기는 어렵다. 그래도 잊히지 않는 기억 몇 오라기가 있다.

 


여행 첫날, 파리의 공항에서 기차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던 길. 이른 아침이었고 날씨도 참 맑았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낯선 양의 집들과 담벼락에 가득한 그래피티. 기차 안에는 낯선 외모의 얼굴들. 먼 땅에 와 있음이 천천히 실감되었다. 겉으로는 여유로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좌석에 기대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이미 난리가 나버렸다.

정말 이곳까지 와버렸구나. 그것도 혼자. 어쩌려고 그랬어 어쩌려고..! 망했다 망했다 클났다 클났어..

친구들과 같이 런던에 처음 도착했던 날이 떠올랐다. "우와 여기가 히드로 공항이야!" 전혀 다른 공간에 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차고 신기했다. 공항에서 도착 기념으로 사진도 남기고, 사람이 드문 밤길을 걸어 숙소로 갈 때에도 함께였기에 무섭지 않았다.

근데 지금은 벌건 대낮인데도 불안했다. 기념사진을 남길 정신은 없었다.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이곳에서 내 몸 하나 간수하기도 바빴다. 기차역을 빠져나와 거리로 발을 내디뎠다. 각자의 목적지로 바쁘게 발을 옮기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 나 혼자만 정처 없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머리가 하얘졌다. 꿈속을 돌아다니는 듯 아직도 현실감이 없었다.

이래선 안 되겠다. 후- 정신을 바짝 차리고 가방끈을 꽉 잡았다. 최대한 초보 여행자가 아닌 척, 익숙한 척해야 해. 어리바리했다간 큰코다친다. 그렇게 센 척으로 무장하고 몽마르뜨 언덕으로 향했다.  



카우치서핑에 대해서는 구구절절 참 할 말이 많다. 하지만 요약하자면 '애증'이라는 말이 적당하지 않을까.

경제적인 면에서는 방값 한번 들지 않으니 말할 것도 없이 최고다. 문제는 방을 내어줄 수 있는 호스트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이다. 스무 명에게 요청을 보내면 보통 서너 명 정도에게서 반나절 안에 답장이 왔다. 그중에 나를 받아주는 호스트는 한 명 있을까 말까다. 될 수 있으면 좋은 코멘트를 많이 받은 호스트로, 되도록 동성에게만 요청을 보내고자 했던 나의 계획은 얼마 가지 않아 와르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나의 첫 카우치서핑 호스트는 파리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Colombes(콜롱)이라는 곳에 사는 젊은 남성이었다. 그에 대해 몇몇 게스트들이 남긴 호평이 있었지만 나는 긴장한 채로 콜롱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내 옆자리에는 검은 수염이 풍성한 중년의 아저씨가 타고 있었다. 착각인지 몰라도 자꾸 날 쳐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말 걸지 마라. 말 걸지 마라.     

속으로 되뇌기 무섭게,

"어디까지 가요?"

이런. 불행히도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다.

"콜롱이요."

"아! 나도 거기까지 가는데."

아저씨는 혼자 있는 내가 궁금했는지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여자애 혼자 몸통만 한 가방을 메고 여기까지 왔다니 놀라신 눈치였다. 아마 앳된 얼굴 때문에 내가 미성년자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아저씨는 늦은 저녁이라 위험하다며 목적지 근처까지 같이 가주겠다고 했다.

막상 대화를 해보니 나쁜 사람 같지 않아서 나는 경계를 풀고 그분과 동행했다.

이게 나에게 찾아온 첫 행운이었음을 그때는 몰랐다.


호스트의 집은 찾기가 어려웠다. 역 앞에서 만났으면 좋겠는데 호스트와는 연락이 되지 않고 있었다. 아저씨와 나는 일단 콜롱역에서 내려 호스트와 연락이 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 틈에 동행이 한 명 늘었는데 역시 콜롱에 살고 계시는 한 아주머니였다. 우리는 아주머니가 아시는 근처의 식당에 가 있기로 했다.

"나는 셀린이야. 가수 셀린디옹 할 때 셀린."

셀린은 목소리가 엄청 크고 하이톤이었다. 그녀는 식당 문을 열고 우렁찬 목소리로 주인을 불렀다.   

"베르나딘! 밀란!"

그러자 두 명의 아저씨들이 마중을 나왔다. 그들은 나를 보더니 셀린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아마 내 상황을 파악하는 것 같았다. 베르나딘은 유창한 영어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고 어디서 지낼 생각인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자 모두가 위험하다며 놀랐다.  

"세상에, 혼자 하는 여행을 너희 부모님이 허락했다고?" 셀린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혀를 내둘렀다.  

베르나딘은 사뭇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우선 그 호스트의 연락처를 줘봐. 우리가 전화해서 이곳으로 널 데리러 오라고 할게."  

우여곡절 끝에 호스트가 식당에 나타났다. 베르나딘과 셀린은 그와 잠시 얘기를 한 후 나를 보내주었다.

"절대 저 사람을 믿지 마. 조심해야 돼. 이건 우리 연락처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베르나딘은 끝까지 신신당부를 했다. 모두가 고마웠다. 지하철에서부터 나를 안내해 준 수염 아저씨.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도와준 셀린과 베르나딘.


호스트의 집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대화를 좀 나눴다. 그는 차분한 성격인 것 같았다. 근데 결정적으로 믿을 만한 타입은 아니었다. 불편한 눈빛과 은근히 기분 나쁜 자잘한 스킨십으로 금세 알아차렸다. 과잉보호라고 생각했던 셀린과 베르나딘의 반응이 이해가 되었다. 호스트는 내가 불쾌함을 표현하자 다행히 더 이상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만약 베르나딘과 셀린이 나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해도 그랬을까? 윽. 지금은 밤이 어두워 어쩔 수 없지만 이 집에서 두 밤은 못 자겠다. 


다음날 일찍 짐을 싸서 나왔다. 던 길을 되짚어 베르나딘의 식당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곳은 식당이면서 이층에는 숙소도 있는 작은 호텔이기도 했다. 당장은 카우치서핑을 또 할 기분이 아니어서 베르나딘의 호텔에 방이 있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베르나딘은 돌아온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빈방은 많았다. 파리에 지내는 동안에는 이곳에서 쭉 머물기로 결정했다. 베르나딘이 방값을 거의 반은 깎아주어 부담도 크지 않았다. 그날 저녁 베르나딘의 식당에 놀러온 셀린과도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나는 낮에는 파리 중심을 돌아다니고 저녁에는 콜롱에 돌아와 베르나딘, 셀린과 시간을 보냈다.


셀린은 콜롱역에서 도보로 15분 정도 떨어진 주택가에 혼자 살았다. 린과는 곧 가까워져서 녀의 집에서 술도 한잔 하고 녀가 다니는 동네 물리치료 클리닉도 따라가 보고 함께 인도 음식점에서 식사도 했다. 베르나딘은 프랑스어에 흥미를 보이는 나에게 좋은 선생님이 되어 주었다. 덕분에 기초 인삿말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어 여행하는 동안 써먹 수 있었다.


인생사 정말 알 수 없다. 하철에서 셀린을 만날 것도. 그녀의 소개로 이 호텔 겸 식당에 오게 된 것도. 그들과 친구가 된 것도. 모두 계획한 게 아니었으니. 때로는 뜻한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일이 잘 풀릴 수도 있.



여성분들 특히, 카우치서핑 진짜 조심해야 한다.

첫 호스트 선택에 된통 실패한 뒤로 나는 나름 요령이 생다. 긍정적인 리뷰만 수십 개는 받은 호스트들 위주로 요청을 보냈고, 만약 답장을 받지 못하거나 거절될 경우에는 과감히 접고 호스텔을 찾았다. 애매한 호스트에게 괜히 요청을 보냈다가 이상한 사람일지도 모르니.

복불복 뽑기를 하는 기분이었지만 이후로는 다행히 좋은 사람들만 만났다. 피렌체의 아름다운 자택에 사시던 맘씨 좋은 할아버지. 저녁으로 파스타까지 대접해 준 소렌토의 한 다정한 커플. 당일에 급하게 보낸 요청을 받아준 고마운 스트라스부르 청년. 베이징의 야시장을 함께 걸어준 냥했던 친구 등..


마음을 열고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이면서도 한으로는 정신줄을 꽉 잡고 경계를 늦춰선 안 되는.

아, 애증의 카우치서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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