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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울메이트 May 06. 2024

한 건 없지만 할 말은 많은 날

#2일차: 담양->보성

자다가 깜깜한 새벽에 잠깐 눈이 떠져 핸드폰을 들여다보는데 날씨예보가 심상치 않았다.

돌풍, 호우주의보, 산사태 주의..

이럴수가. 비가 올거라는 건 알고 있었어도 주의보가 내릴 정도로 올 줄은 몰랐는데..!


어떡하지 하면서 눈만 끔뻑거리다가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는 다시 스르륵 잠에 들었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 그저 예보가 딱 들어맞지는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기상청의 예측은 정확했다. 다음날 아침, 도로에 고인 빗물에 발이 철벅일 정도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포기할쏘냐. 배낭을 방수커버로 단단히 매고 우비로 몸을 감싼 우리는 어제와 달리 조금 비장한 마음을 먹고 출발했다. 비로 적셔진 아스팔트는 몇배로 미끄러워진 상태라 속도를 조금만 올리는 데에도 신중해야 한다.


그런데 달리다 보니 비보다 바람이 문제였다. 점점 거세지는 맞바람에 중심을 잡기가 더욱 어려워지는 상황. 주유를 하려고 잠시 멈춘 틈에 우리는 고민에 빠졌다.


붑커>> 어떡하지? 바람이 많이 불어서 위험하네.

나>> 음.. 내 생각엔 오늘은 광주에서 자고 바람이 좀 잦아들면 내일 움직이는 게 좋을 거 같아.

붑커>> 흠..

겁이 많은 나는 이때다 하고 오늘은 쉬자는 제안을 했다. 남편은 미간을 찌푸리며 좀더 고민하더니,

붑커>> 한번 가볼까? 가다가 안되겠으면 중간에 멈추면 되니까.

나는 겁은 많지만 팔랑귀이기도 하다. 남편이 한번 해보자고 하니 또 금세 해볼 마음이 생기는 건 뭘까. 유소 건너편의 가로수가 바람풍선 인형처럼 휘휘 춤을 추는게 뻔히 보이지만 말이다.

나>> 좋아. 가자!

작은 길로만 천천히 다니고, 안되겠으면 화순에서 멈추기로 하고 우린 다시 조심스레 바이크에 올랐다.



바람에 우비가 낙하산처럼 펼쳐져 펄럭이긴 했지만 초반엔 나쁘지 않은 듯 했다.

그러나 계획과 달리 비게이션이 안내한 곳은 최고속 80으로 달리는 큰 도로(자동차 전용도로는 아니었다)였고, 어느새 우리는 쌩쌩 질주하는 차들 가운데 홀로 돌돌돌돌 위태롭게 달리 있었다. 최대한 빨리 가고는 있어도 80에는 어림도 없었고 그 가까이 속력을 냈다가는 미끄러지고 말 것이었다.


수많은 차들이 쌔앵 쌔앵 빗물을 튀기며 우리를 스쳐 지나간다. 그때였다.

갑자기 한 차가 우리 바이크가 달리는 차선으로 들어와 좌측으로 바짝 붙어 내 다리를 스칠 듯이 추월을 했다.

나>> 뜨헙.

악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명을 지르면 남편한테 아무 도움이 안될 거 같아서 간신히 입을 닫았다.

붑커>> 괜찮아?!!

남편이 걱정되어 나에게 물었다.

나>> 어..! 괜..찮아! 

걱정시키기 싫어서 괜찮다고 거짓말을 했다. 후- 후- 심호흡을 몇번 하여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을 진정시켰다. 눈물이 찔끔 나왔다.


나는 잔뜩 긴장했다 (아마 운전을 하는 남편은 더 그러했을 거다). 눈을 몇초간 감고 딴생각도 해보고, 먼산을 바라보며 감상을 해보려고 노력도 했는데 사실 심장이 벌렁거려 풍경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세찬 비마저 손등을 따가울 정도로 때려댔다. 신발은 이미 워터파크였고 거센 바람에 비가 우비 안으로 들이쳐서 옷도 젖어가는 마당이었다. 몸이 오들오들 떨려왔다.

게 어릴적 추억이 떠올랐다. 엄마가 도서관에서 빌려다준 동시집에 있던 웃긴 시가 있었는데. 김용택 시인의 설사에 관한(?) 시였다. 밭을 메러 나갔다가 소는 도망치고 소나기는 내리는데 설사까지 났다는. 당사자는 슬프겠지만 읽는이에게는 웃음을 주는 내용의 시. 지금 내가 딱 그같은 상황이다 싶다. 상가상.

빨리 이 도로를 벗어나서 돌이켜보면 웃음만 나오는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건만. 실제로는 몇분 달리지 않은 그 길이 왜이리 길게 느껴지던지.


그 때, 조금 더 가면 휴게소가 나온다는 반가운 표지판이 보였다. 

나>> 여보야 우리 저기서 멈추자!

마침내 지옥길 같았던 그 도로를 벗어나 시골길로 들어 수 있었다.


운빨 한번 기가 막히다. 호우특보+강풍특보+풍랑특보 3콤보를 획득하셨습니다!

나>> 으앙 작은길로 가기로 했잖아~! 왜 큰길로 가는 거야 왜애~!

붑커>> 지도가 그 길만 보여줘 나도 이럴 줄 몰랐어.

나>> 무서웠단 말이야~!

위기에서 벗어나고 나니 그제서야 맘놓고 우는 소리 좀 낼 수 있었다. 남편도 당황했던 모양이다. 어쨌든 살아서 기뻤다.

시골길은 곳곳이 막혀있거나 지도와 다른 부분이 있어 조금 헤매기도 했으나 끝내 무사히 보성군에 들어올 수 있었다.

보성에 막 들어와서 찍은 기념사진. 옷을 손으로 짜면 탈수 전에 꺼낸 빨래처럼 물이 쭉쭉 나올만큼 홀딱 젖은 남편이다. 그 와중에 활짝 웃었네.

남편은 물에 빠진 강아지처럼 말 그대로 부들부들 온몸을 떨고 있었다. 찾아보니 얼마 안가 숙소가 있었다. 숙소까지 3km 이내라고 했더니 남편 입에서 "알 함~도릴라(하느님 감사합니다)!!"소리가 저절로 나욌다.


숙소에 도착하고서 감사의 마음은 더욱 커졌다. 비바람이 점점 거세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만할 때 도착해서 천만 다행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녹차밭을 거닐고 있겠지만 지금 이 날씨에는 집 마당도 나설 게 못된다. 우리는 후다닥 햄버거만 먹고 들어와 방에 콕 박혀서 몸을 녹였다. 율포 해수욕장에서의 캠핑은 말할 것도 없이 물 건너갔다. 지금 남서쪽 해안에는 풍랑주의보까지 내려 있었다.


비는 아직도 화난 듯이 퍼붓고 개천에는 흙탕물이 다리 바로 아래까지 차올라 콸콸 흐르고 있다. 어찌어찌 보성까지 온 게 신기할 정도다. 비록 오늘 한 일은 빗속에 바이크를 탄 게 전부일지라도, 또 이런 날이 있어야 여행기가 재미있어지는 법이다.


여행 2일째. 70km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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