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숙소 근처의 작은 커피숍에 앉았다. 가방을 내려놓고 14시간 좁은 비행기 좌석 안에서 구겨졌던 다리를 쭈욱 펴니 살 것 같았다.
5월,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적당한 햇빛, 그늘 아래는 적당한 서늘함. 노상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며 멍하니 앉아있기 참 좋은 날씨였다.
남편은 "집에 온 기분이야!"라며 음미하듯 공기를 들이마셨다. 가게마다 길가에 펼쳐놓은 테이블과 의자, 거기에 여유롭게 때로는 게으르게 앉아서 일행과의 대화를 즐기는 손님들, 그 옆으로 느릿느릿 걸어가는 행인들, 별로 넓지 않은 도로를 별로 빠르지 않게 달리는 차들, 주로 노랑과 주황빛이 감도는 집들, 집집마다 베란다에 고슬고슬 말라가는 빨래들. 모로코 엘자디다의 한 골목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풍경이다.
잠깐 모로코 이야기를 하자면..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엎어지면 코닿을 곳에 이웃해 있는 두 나라 모로코와 스페인. 지리적으로 가까울 뿐 아니라 과거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했던 기간, 이후 스페인이 모로코를 식민지배한 기간을 거치며 문화가 섞이고 사람도 섞였다.
스페인에는 이민을 온 모로코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서 길가다 모로코 말로 인사를 하면 열명 중 서너명은 뒤돌아 볼 것이다.
특히 모로코 축구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걸어다니는 날에는 하루에도 몇번씩 모로코 사람들의 인사를 받았다. 우리를 보고 "디마 마그립 (모로코 파이팅)!" 하고 외치며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식당에 들어갔을 때 맞이해주시는 종업원이 모로코 사람인 적도 있었는데 결국 그곳에서 식사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로코에서 온 형제라는 이유로 우리에게 다른 맛집 정보를 알려주었다.
이러한 까닭에 가끔은 일부러 유니폼을 입고 다니기도 했다.
바르셀로나의 버스커들
바르셀로나는 과거 잠시잠깐의 독립을 선언했다가 스페인 정부의 반대로 단 몇초만에 다시 스페인령으로 돌아간 안쓰럽고 특이한 이력을 가진 카탈루냐라는 국가(가 될 뻔 했던 비운의 지방)의 주도이다. 그래서인지 아파트의 베란다나 빌딩의 꼭대기 등에는 스페인 국기보다 카탈루냐 국기가 더 많이 걸려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이 현재까지도 작용하는 듯, 같은 스페인이라도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바르셀로나 어딜가나 볼 수 있는 카탈루냐 국기
일단 사람들의 옷차림부터 달랐다. 바르셀로나에서는 다들 개성이 넘치는 복장에,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노출이 심한 옷도 서슴지 않고 입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중교통에서도 다를 것 없었다. "저게 옷이야 비키니야..?"
다들 집에서부터 미리 옷을 갈아입고 수영하러 가는 길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바르셀로나 유명 누드비치. 이름은 누드비치여도 실로 발가벗은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라 큰 걱정(혹은 기대?)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에 비해 우리가 본 마드리드 사람들은 옷을 갖춰 입는 편이었다. 도시가 전체적으로 소란스럽지 않고 깔끔하고 정돈된 느낌이었다. 지하철에서 큰소리로 떠드는 승객도 바르셀로나에 비해 별로 없다. 마요르 광장, 솔 광장이 있는 중심지는 물론 시끄러울 수밖에 없지만 조금만 벗어난 주택가는 개미 기어가는 소리도 들릴 것처럼 조용하다.
시가지의 모양도 두 도시가 많이 다르다. 바르셀로나는 큰 도로를 거의 보기 어렵다. 람블라스 거리가 그나마 가장 넓은 도로이지만 차도 별로 다니지 않고, 도로변은 카페와 레스토랑들의 파라솔 밑에 앉아 이야기 꽃을 피우는 사람들의 소리로 가득하다. 마드리드는 도로가 큼직하고 시원한 모양으로 쭉 뻗어있다. 주변의 건물들도 규모가 큰 편이다. 밖에 앉아 대화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 광장에서 볼 수 있고, 도로변은 의자나 테이블이 별로 없이 도보의 용도로 쓰인다.
나>> 모로코로 치면 바르셀로나는 관광도시 마라케시랑 비슷하고, 마드리드는 반듯반듯한 라바트랑 비슷한 것 같아. 붑커>> 맞네 맞네. 바르셀로나의 거리가 스스럼없는 오랜 친구와의 만남 같았다면, 마드리드의 거리는 용모 단정하게 나간 첫 데이트 같은 인상이었달까.
마드리드의 돈키호테 동상 앞에서.
'안녕하세요. 저희는 지금 막 마드리드에 도착했습니다. 체크인 시간까지 아직 남긴 했는데 혹시 조금 이른 체크인도 가능할까요?' '아니요.' '알겠습니다. 체크인 전에 저희 가방 한개만 맡겨둘 수 있을까요? 방 말고 쓰지 않는 작은 빈 공간이 있다면요.' '안됩니다. 마드리드 시내의 라커를 이용하세요.' 마드리드 에어비엔비 호스트 디에고와의 첫 대화였다. 디에고가 한 말 중에 틀린 건 하나도 없었지만 내심 바르셀로나의 한없이 너그러웠던 호스트 데이비드가 그리워졌던 것도 사실이다.데이비드는 우리가 야간버스를 타러 가기 전까지 거의 반나절을 추가비용 없이 배낭을 맡아주었는데 흑흑. 어디까지나 이건 호스트가 베푼 호의였을 뿐이니 다른 호스트에게도 같은 친절을 요구할 권리가 우리에겐 없었다.
체크인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라커에 돈을 쓰기는 아까워서 그냥 가방을 지고 다니기로 했다.
아래 사진 속, 여유 가득해보이는 풀밭에서의 휴식은 사실 가방은 무겁고 갈곳은 없어 공원에서 잠깐 내려놓고 땀을 식히는 모습이다.
알고보면 사연이 있는 사진이다.
마치 우연의 일치처럼 스페인에서 우리가 머물렀던 두 숙소의 호스트들 역시 각각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의 첫인상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푸근하고 인정 넘치는 유연한 사람이었던 바르셀로나의 데이비드. 규칙을 중요시하고 매사에 명료했으며 성격만큼이나 숙소도 깨끗했던 마드리드의 디에고.
호불호는 있을 수 있지만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고 할 수 없다. 중요한 건 둘 다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고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이 두 사람으로 각 도시를 정의한다는 건 말도 안된다. 이는 그저 우리가 받았던 지극히 개인적인 두 도시에 대한 인상을 묘사하기 위해 든 예시일뿐이라 재미로만 봐주시길 바란다 하핫.
몇가지 사진을 덧붙이며
To be continued..
아직 공사중인 사그라다파밀리아 성당. 성당의 내부는 시간이 변함에 따라 다른 색의 빛깔로 물든다. 가우디는 이 성당을 디자인 할 때 자연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역시 가우디가 설계한 구엘공원. 독특한 모양과 구조에서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움과 창의력이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