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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어 하나와 150만원

by 경주정착러 앵


한달살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그날 저녁, 가족들은 어스름한 저녁 빛에도 가맣게 그을러버린 나를 보고 경악했다.


"너 선크림.. 안 발랐어?"


안 발랐다. 햇볕 까짓거 세봤자 내가 이기지, 하는 이상한 아집이 있었다. 미디어를 통해 햇볕의 무서움을 익히 들었으나 대체로 건물 또는 지하철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내게 그다지 경종이 울릴만한 정보는 아니었다. 내가 해를 보면 얼마나 보고 산다고..


그러나 이글지글 끓어오르는 감포의 햇볕에서 나는 온몸으로 교훈을 얻었다. 이 시대의 태양은 자비없고 공평하게 내리쬔다. 자칫 잘못하면 아프게 타 버린다. 아프지 않도록 선크림은 미리미리 바르자.


나는 그냥 갈색 인간이 되었다


그날 저녁, 5주 만에 집으로 돌아온 수상한 딸에게 부모님은 별다른 내색없이 평소처럼 말했다. 지글지글 빗소리 내는 삼겹살도 구워먹였다. 한 달쯤 긴 여행을 다녀왔을 뿐이다. 한 번씩 삶에 환기가 필요할 시절이 아닌가. 요즘 젊은 애들은 다 그렇게 산다. 이제 다시 우리의 일상은 이어질 것이었다.


그런데 그 딸이 대뜸, 경주에 가서 살겠노라 폭탄 선언을 해버렸다. 아버지는 전라도, 어머니는 강원도, 나고 자란 곳은 충청도, 청춘을 보내고 있는 곳은 서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경주라니? 거기엔 우리가 아는 그 무엇도 없는데. 첨성대가 있는 거기. 불국사가 있는 거기에 살겠다는 거니. 네가. 무슨 수로. 어째서.



이제는 오래된 기억이라 가물가물 하지만, 어머니가 아버지의 팔을 툭툭 건드리며 "쟤, 쟤 눈 좀 봐." 했던 게 생각난다. "이미 너 혼자 다 결정하고 말하는 거구나." 그 말로 미루어보아 당시의 나 눈에는 어떠한 치기 섞인 결의가 가득했던 듯 싶다. 좋게 말하자면(친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험을 떠나려는 자의 눈빛 같은 것 아니었을까.



그러나 지금 그때를 생각하면 두고두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어쩌면 그렇게, 누구를 닮아 그토록 멋대로인지. "그래.. 네가 그렇다면.." 하고 말끝을 흐린 부모님에게 존경의 입맞춤을 해드리고 싶을 정도다. 조금 더 다정하고 섬세하게. 덜 이기적인 방식으로 통보할 순 없었을까. 애초에 '통보'라는 것의 성질이 쌍방향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더 나은 방식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간지 2주만에 친구와 나는 주변의 잔소리와 염려, 걱정 속에 캐리어 하나와 150만원을쥐고 경주로 돌아왔다.


캐리어 하나와 150만원

그게 우리가 가진 전부였다. 그리고 우리 두 사람.

그런데도 다 가진 것 같았다. 뭐가 그리 좋아서 내내 깔깔거리고 웃었다.




우리는 시내 근처 방 하나를 보자마자 계약했다. 자취를 처음 해보는 친구의 이름으로 계약서를 썼다. 내 친구는 이제 살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된 방 하나를 갖게 됐다. 그것마저도 우리에게는 업적이고 성취였다. 우리가 경주에 방을 얻다니! 그 기쁨은 서울에서 방을 얻을 때와는 사뭇 다른 거였다. 내가 선택한 도시에, 내가 선택한 방이었다. 월세를 올려달라는 집주인의 말이나, 신경 쇠약에 시달리게 했던 소음 따위에 쫓겨 이리저리로 옮겨다녀야 했던 시절과는 차원이 다른 거였다.



썰렁한 방 안에는 오직 우리 두사람과 캐리어 두 개가 전부였다. 이미 입주 청소가 되어있다던 집주인의 말과는 다르게 발바닥이 까매질 정도로 먼지가 가득했다. 빈정이 상할만한데도 우리는 이내 깔깔거리며 물걸레로 방바닥을 벅벅 닦았다. 엉금엉금 방바닥을 기어다니는 서로를 보며 배가 아프도록 웃었다.



그건 정말이지 함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으 디러


속 좋은 우리는 그 난리를 치루고도 거뜬히 밤마실을 나갔다. 유명하다는 한우물회도 먹고 인생네컷도 찍었다. 길거리 색소폰 연주자의 음악에 발이 묶여 한참을 서있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엔 동네 지인에게서 얇은 여름 이불 서너 장을 빌렸다. 캐리어만 달랑 베고서 잘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깔고 덮을 건 있어야지. 그러면서도 우리는 아무런 걱정도 누추함도 없이 신나게 잠에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불 한 장 없이 내려가 방부터 얻었다는 딸래미들을 생각하는 부모님들의 속이 얼마나 탔을지... 이제와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




돌아오는 주말엔 가족들이 나의 묵은 짐을 이고 지고 경주로 와주었다. 당신들께선 하고픈 말이 많은 눈치였지만 끝내 아무말 않으셨다.


이삿짐을 넣어두고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둘러보시라는 나의 말에 첨성대를 보러갔다. 처음엔 덥고 배고프다고 시큰둥했던 부모님이 수십년 전과 완전히 달라진 경주의 풍광에 오래도록 발목이 잡혔다. 이야, 그때랑은 완전히 다르잖아. 그때는 왜 이런 게 안 보였지. 조금 더 걸어들어 가볼까.



요상하게도 그날은 하늘마저 거짓말처럼 아름다웠다. 이 상황이 현실이라는 게 오히려 꿈같이 느껴졌다. 앞으로의 일이 어떻든, 나의 선택이 조금이나마 이해된다는 눈치였다. 그날은 정말이지 그럴 수밖에 없는 풍경이었다.





다 가진 기분

평생을 살아도 다 가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다 가진 기분'을 가지는 것은 가능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무것도 가지려 하지 않았을 때,

가진 것들로만 하루를 꽉 채울 수 있었을 때,

우리는 가장 풍요롭고 자유로웠다



그 시절보다 집도 넓어지고 벌이도 좋아졌지만

그 시절보다 명랑하냐 물으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그러니 다시 가난해지자는 뜻이 아니다.

얼마나 가졌느냐와 상관없이

가진것만으로도 하루를 충분히 채워가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렇게 글을 쓰며 지난날을 반추하니 새삼 내가 앉아있는 이 집, 이 식탁, 이 공간이 생경하다.

그리고 감사하다. 지금 여기에 집중하면 생각보다 많은 문제들이 해결된다.



눈을 감고, 숨을 골라보자. 그리고 내가 가진 공간, 몸, 지금에 집중해보자.


그리고 이제 오늘을 충분히 누리시라. 우리에겐 그럴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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