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평범한 가정에서 물질적이나 정신적으로 부족한 거 없이 자랐다. 하지만 뭘 할 때마다 항상 숫자를 가장 먼저 신경 쓴다. 가령 맛집을 갈 때 가기 전 음식은 얼마인지 확인하고, 누굴 만날 때 얼마 쓰겠다고 미리 생각한다. 이런 내 모습을 본 부모님은 젊은 때 돈을 써봐야 나중에 돈을 쓸 줄 안다고 말씀하시며, 나에게 조언의 탈을 쓴 다그침을 하신다. 그래서 나도 이런 내 모습을 고치려고 노력했으나, 이미 내 삶의 일부가 되어버려 쉽게 변하지 않는다.
난 어릴 때 부모님에게 용돈을 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필요한 게 있으면 부모님에게 말씀드렸고, 부모님은 필요한 만큼 돈을 주셨기 때문이다. 누나도 나와 똑같았는데, 누나는 나랑 다르게 부모님과 돈 관련 다툼이 존재했었다. 누나는 부모님께 인강을 듣기 위해 pmp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컴퓨터로 들으면 된다고 이야기하시며 반대했다. 누나는 오랜 대치 끝에 결국 원하는 것을 얻었고, 인강은 물론 드라마도 재밌게 보곤 했다. 누나는 이 외에도 화장품, 신발 등 필요한 게 생기면 사달라고 바로 이야기했다.
이런 누나와 달리 난 부모님에게 사달라는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정말 필요한 게 없어서 사달라고 이야기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당시의 난 내가 필요한 게 무엇인지 생각조차 못했던 것 같다. 그나마 생각해본다면 겟앰프드에서 액세서리를 사기 위해 필요한 문상이나 틴캐시..?
필요하거나 갖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부모님을 설득해야 하는데, 솔직히 난 그럴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포기했다. 비싸니깐 사달라고 이야기해봤자 안 사주겠지라고 스스로 단념해버렸다. 그러다 보니 내가 정말 필요한 게 있더라도 항상 가격을 먼저 보았다. 합리적인 가격이라면 큰 어려움 없이 부모님에게 사달라고 이야기할 수 있으니깐.
성인이 된 후 이런 내 모습은 소심함에서 답답함으로 바뀌었다. 애초에 답답한 거지만, 어렸을 땐 '쟤는 소심해서 그래'라고 넘어가 준 것이다. 이제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니 더 이상의 배려는 없다. '왜 그렇게 답답하냐'라는 질책으로 변했다. 난 '왜 저러는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더 답답한, 아니 꽉 막히고 고집이 강한 놈으로 바뀌어 갔다.
이때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일화가 있다. 5년 전, 편입 동기 누나가 시험 끝난 후 학교 근처 식당에서 밥을 사주었는데, 메뉴는 동파육과 중화식 볶음면, 볶음밥으로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음식이었다. 그래서 싱글벙글하면서 누나를 따라간 후 메뉴판을 봤는데 가격이 생각보다 비싸서 놀랬다. 1인당 15,000원에서 20,000원 정도로, 그때 당시 2,800원, 3,500원 학식으로 배를 채웠던 나에겐 비쌌다.
비싼 거 아니냐고 누나에게 이야기했는데, 한 번도 안 먹어 본 음식이니 이 정도 가격은 괜찮다며 바로 주문했다. 음식을 기다리면서 누나는 나에게 혼자 서울에 있으니 이것저것 많은 걸 경험해보라고 이야기해줬다. 그러면서 누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세세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그때 느낀 감정만큼은 확실히 기억한다. 나도 누나처럼 다른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주변 사람들은 날 보고 간접적으로 조언을 주었다. 동아리에 들어가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봐라, 편입 준비도 중요하지만 과모임이나 조별과제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 이것저것 해봐라 등등 나에게 이야기해준 게 떠올랐다. 그때 당시엔 잔소리라 생각하고 흘려 넘긴 게 굉장히 아쉬웠지만, 지금이라도 다양한 것을 경험해보려고 노력 중이다. 지금 하고 있는 노력 중 하나인 글쓰기는 꾸준하게 하고 있다.
이제서야 부모님께서 말씀하시던 '젊었을 때 돈을 써봐야 된다.'를 제대로 이해했다. 많은 것을 경험해보면서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 보라는 조언이었다. 분명 부모님은 지금 내가 느낀 걸 내 나이 때에 경험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땐 경험할 수 없는 상황이라 경험해보지 못한 게 많아 이에 대한 아쉬움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니 비록 난 못했으나, 자식은 많은 걸 경험해보면서 자기 주관을 가지도록 노력해보라는 부모님의 진심 어린 조언이었다.
지금은 스스로 돈을 벌고 있고 주변 사람들과 맛있는 거 먹고 나서 내가 계산할 때가 많다. 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맛있는 거 먹는 게 즐겁기에, 계산하는 게 전혀 아깝지 않다. 더 기분이 좋은 건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날 걱정해주는 것이다. 어딜 가든 다 긁고 다니는 거 아니냐, 호구되면 안 된다 등의 이야기를 들으면 옛날 짠돌이 시절의 내가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