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만 없는 사람

묵묵히 맡은 일을 했을 때 생기는 오해

by 백동열

"쟨 뭐든 불만 없이 열심히 하니깐 힘든 일 시켜도 상관없어."


얼마 전 야근하고 선배들과 저녁 먹으면서 들은 이야기다. 쟤는 날 의미하고, 그렇게 말한 사람은 국장님이다. 어쩌다가 난 불만 없이 맡은 일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이번 주 5일 중 4일 동안(화-금) 집에 늦게 들어갔다. 2일은 외부 일정과 회식한다고, 나머지 2일은 어쩔 수 없이 야근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국장님이 진행 중인 해외 업무를 끝내지 못하면 다음 주 휴가를 못 간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가장 억울한 사실은 업무가 지연되는 이유는 해외 업체의 연락 두절과 업무 미숙 때문인데, 왜 내가 피해를 겪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그리고 국장님은 그저 날 일하는 도구로만 생각하는 걸 깨달았다. 해외 업체가 일주일 동안 연락을 안 했다. 일주일 후 어렵게 연락이 닿았을 때, 몸이 너무 아파 일을 못했다고 한다. 목소리를 들었을 때 너무 아픈 게 느껴져서 놀라 바로 보고했는데, 그럼 업무 대행자가 누구인지 물어봤어야지 왜 안 물어봤냐고 한소리 들었다.


해외 업체는 내가 선정하지 않았다. 15년 전 구매했던 업체가 아직도 영업 중인지 확인해 보라는 지시가 있어 알아보다가 아직도 있는 걸 확인한 후 그렇게 지금까지 오게 되었다. 영어로 의사소통이 굉장히 힘들었고, 매번 요청 사항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업체 담당자 때문에 항상 나만 괴로웠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과거엔 해외 현지에 거주 중인 지인이 있어 업무 진행 상황을 직접 체크해줬다고 한다.


주변 사람에게 위로를 많이 받았지만, 실망도 많았다. 5개월 만에 제작 완료 물품에 대해 최종 승인을 받고자 보고하러 간 국장님을 기다리는데, 무슨 일이 생긴 건지 평소보다 결과를 늦게 알려줬다. 기다리던 중 옆 부서 팀장님은 아직도 안 알려줬냐고 물어보면서 옛날에는 전화, 인터넷도 없이 팩스로만 일 했는데 뭐가 힘드냐고 말했다. 팀장님은 별 뜻 없이 한 이야기였겠지만, 난 그 말 하나에 기분이 상했다.


그리고 분명 업무 전 유관 부서는 업무 진행 상황을 체크하기로 협의했다. 왜냐면 원래는 유관 부서에서 진행하라고 지시했는데, 어째서인지 국장님은 그 업무를 가져왔다. 이후 최근에 진행 상황 더블 체크를 요청했을 때 내 일도 아닌데 그걸 왜 알아야 하냐고 말했다. 게다가 내가 쓴 영어 메일 중 괜찮은 것들은 나한테 아무 말 않고 본인 팀원에게 공유했다면서, 잘하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날 위로한다. 업무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사람이 그런 말 하는 게 너무 어이가 없었고, 몇 시간 동안 고민해서 쓴 내 메일이 동의 없이 공유된 사실을 안 이후로 참조에서 빼고 있다.


실망해도 티 안 내고 묵묵히 열심히 했다. 억울하지만 어쨌든 내 업무이고, 맡은 일은 끝까지 잘 마무리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내 헌신은 내 예상과 달리 위에선 당연하게 여겨졌다. 씁쓸해하던 중 예전에 쓴 글 중 하나인 기버와 테이커에 대한 글이 생각났다. 그 당시 난 기버로 남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지쳐서인지 내 생각이 흔들리고 있다. 결국 집단에서 테이커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결국 모두 다 테이커로 변하는 건 사실인 것 같다. 아울러 예전 미팅에서 업체 담당자가 중이 절에 적응하거나, 떠나거나 둘 중 하나라 이야기하면서 서로 처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한 게 생각났다.


여러 복잡한 생각과 계속되는 늦은 퇴근으로 피곤하던 중 날씨는 추운 겨울에서 완전히 벗어나 따뜻한 봄으로 바뀌고 있다. 햇볕이 따뜻한 점심시간 선배와 커피 마시면서 우스갯소리로 지금 우리 팀에 한숨 전염병이 퍼진 거 같다고 이야기했다. 다들 공감인지 웃음을 터트려냈고, 웃음 후 씁쓸함은 따라왔다.


씁쓸함에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이전에 쓴 새해 다짐 글처럼 내 삶을 다채롭게 만들려고 나름 노력했다. 아쉬운 건 노력만 했고, 다음으로 넘어가질 못했다. 운동하려고 집 근처 주짓수와 복싱 도장에 직접 가서 상담을 받았다. 그런데 계속해서 집에 늦게 들어가게 되어 등록조차 못했다. 공부하려고 근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지만, 다 읽지도 못하고 반납했다. 무작정 가보고 싶었던 곳을 가서 둘러보았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래도 처음으로 심야 영화도 보고, 이쁜 카페에 가 신나는 노래를 들으면서 나만의 시간을 보낸다. 퇴근 후 즉흥적으로 한강에 가 해 저무는 것도 지켜봤다. 지금 잠깐 힘든 상황에 놓인 거라 생각하면서, 나중에는 더 좋은 상황에 놓이겠지라 애써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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