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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인 Jan 05. 2024

얼어붙은 논길 옆을 걷다가 쓰는 글

요즘에는 내가 살아가며 만나게 되는 장면마다 사는 게 뭘까 대입해보는 버릇이 생겼다. 내 인생에 대한 방향성 상실의 방증일지도. 하지만 이런 버릇도 나쁘진 않다. 생각의 범위가 확장됨을 몸으로 마음으로 느끼니까.


오빠의 강요같은 추천으로 얼마 전부터 걸음 수 세는 어플을 깔아 하루에 20-30분 정도의 걷는 시간을 가진다. 핑계대고 싶진 않지만 마침 바쁜 시즌이라 내가 걷기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은 아침 출근 시간 뿐이다. 1시간 거리의 내 집에서 여유있게 아침 6시 50분쯤 출발하면 나에게 딱 30분 정도의 여유시간이 생기는데 그 시간을 활용하는 것이다. 나름의 루틴이 생긴 것 같아 좋다. 이제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워킹타임'으로 자연스레 몸이 먼저 움직이니 그런 과정들이 뿌듯하다.


그 하루들 중 오늘은 최근 들어 꽤 추운 날이다. 회사 뒤 논길을 도는데 오늘따라 얼어붙은 논바닥이 감상을 갖게 한다. 짚들 사이로 얼음이 낀 것이나 멀리서 보면 설산처럼 하얗게 서리내린 것이나 나름의 보는 재미가 있다. 왼쪽 논은 꽁꽁 언 반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찰랑는 논바닥이다. 또 어디는 메말라있는 곳이 있는 반면, 다른 곳은 여전히 풀밭이다. 사람들이 복작대며 무리지어 사는 마을 너머엔 그들을 먹여살릴 논과 밭이 있다. 얼어있는 도랑과 흘러가는 도랑이 공존한다. 사실, 우유부단함을 경계하는 나로서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말이 그리 달갑지는 않지만 오늘은 이 만물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것 같아 고맙다.


누군가는 농사를 짓고, 누군가는 비료를 판매한다. 누군가는 벼를 벨 낫을 만들고 또 누군가는 그 낫을 나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사무실이 따숩다며 그 방 한 칸에 갇혀있는 내가 몹시도 좁고 나약하게 느껴진다. 곱다고 생각진않지만 오늘은 내가 온실 속 화초 같다. 도랑 틈새 얼어있는 사람이고 싶진 않다. 흘러가는 물이고 싶다. 말라가는 가지이고 싶지 않다. 언제든 생명력 있는 사람이고 싶다. 아무래도 오늘은 걷길 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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