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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인 Jan 14. 2024

습도 높은 어느 저녁에 쓰는 글

1월 5일 마지막 글 이후 오랜만에 브런치를 켠다. 그 사이에도 시간은 흘렀고 언제나와 같이 많은 일들, 많은 감정들이 지나갔다. 매년 1월 10일까지는 연례행사로 예산 결산 업무때문에 야근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올해 1월 10일까지 나는 야근을 했다. 이런저런 일들로 사생활이라는 영역 자체가 나에겐 매우 성가신 상태였기에 올해 결산은 나에게 고맙게 느껴졌다. 작년까지만 해도 번아웃이니 뭐니 나를 해치려는 존재같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올해는 결산 덕분에 나의 삶을 지켜냈다. 여전히 나에겐 인사발령이라는 큰 산이 하나 남았고, 편도 1시간의 고속도로 출퇴근이 생각보다 그리 만만치는 않아 나는 일에 몰두함으로서 그 문제들을 외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산을 끝내놓고 보니 나에게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나에게 잔흔으로 남은 파혼이라는 문제도, 그러면서 행해진 이사도, 인사발령도.. 많은 일들로 작년 11월부터 제정신 아닌듯 산 시간들이 2개월이 조금 지난 지금, 일부러 결산이라는 타겟을 잡아 늘어졌었다. 때로는 걸으며, 때로는 글을 쓰며 어떻게든 흔들리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그리고나서 결산이라는 나의 인질이 사라지고보니 나만 남아있었다. 이제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막막함도 잠시 무한한 선택의 장이 다음 챕터로 등장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파혼이라는 내겐 꽤 큰 사건 후에 나는 몇 가지 습관들을 만들어왔었는데 이 습관들이 나를 잡아준 것 같아 이 글로서 누군가에게 추천을 하고싶었다. 일기쓰기(현재 인식), 글쓰기(생각 분출), 걷기(에너지 분산), 고민 없이 행동하기, 나에게 부모가 되어주기. 주절주절 해석할 필요 없이 워딩 그대로다.(그러면서 아래 내용은 또 주절주절.) 아침 또는 저녁 편한 시간에 부담없이 일기장에 계획이든 결과든 생각이든 할 것 없이 현재의 나를 적는다. 놀랍게도 11월 말부터 이어온 내 일기의 감정변화는 매우 긍정적이고 자기확신 가득한 내용으로 변했고, 이 변화 자체가 나를 또 변화할 수 있게 만들어줬다. 글쓰기는 나에겐 곧 브런치였다. 내가 느끼는 감정, 상황들을 최대한 사실적이고 촘촘하게 기록하려 노력했다. 그러면서 현재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고, 현재에 집중할 수 있어서 불안감이 줄어들었다. 걷기는 나에게 명상과 자기암시의 시간을 제공한다. 하루 딱 30분씩 걸으며 나만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클래식을 틀어놓고 하루의 일이나 하고싶은 일이나 갖고싶은 것들이나 무엇이든 좋았다. 생각이 많은 나에게 이런 시간은 하루 중 아주 귀한 시간이었다.

 

고민 없이 행동하기나 나에게 부모가 되어주기는 조금 뜬구름 잡는 소리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직전 연애에서 스스로 약속했던 건 '상대에게 귀찮음을 느끼지 않기'였다. 귀찮아서 달려가지않고, 귀찮아서 그가 원하는 걸 들어주지 않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늘 나의 연애는 그런 식이었다. 그러나 연애라는 행위를 끝내놓고보니 왜 나는 나에게 귀찮음이라는 이유로 많은 것들을 놓쳐왔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우선이 아니라 타인이 우선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 생긴 일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핑계대지않고, 고민하지않고 행동하는 것을 1원칙으로 삼았다. 운동갈까?할 때 옷부터 갈아입고, 뭐 좀 해먹을까?하면 장보거나 요리할 준비를 한다. 그것은 하루를 밀도있게 만들어 지나고보면 꽤 많은 걸 이루도록 해준다.


내가 나에게 부모가 되어준다는 것은 특히나 나에게 의미있는 일이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의 특징이라고 흔히 말하는 '남의 선물 몇날며칠 고민하기'는 내가 갖고있던 행동특징이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을 살 때는 다이소 물건들도 2, 3일 고민하다가 사는데 남자친구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들은 10만원대도 척척 사주고 손가락을 빨았다. 이건 물건에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스스로에게 '너 필요한 게 뭐야?'나 '너 지금 어떤 생각하고 있어?' 물어봐주는 사람들이 많을까? 나는 진심으로 자기 자신에게 다가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본다. 나에게 이부자리도 깔끔히 해주고, 향 좋은 바디워시로 샤워하게 하고, 성분 좋은 재료들로 요리해주고. 불과 한 두달 전까지는 유기견 같았던 내가 최근 샤워하다가 '나 좀 집강아지인 거 같아'라는 생각을 했었다. 스스로를 아낌없이 챙긴다는 건 결국 그런 나를 귀하게 여기도록 계속해서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번 주말에는 일정상 미뤄왔던 머리 정리도 하고, 집 청소도 하고, 갖고싶었던 바디밤도 사고, 보고싶었던 드라마도 실컷 보고, 음악도 들었다. 주중에 피로가 많이 쌓였는지 어제는 14시간동안 내리 자기도 했다. 아마 최근 1년간 수면시간 8시간을 넘은 적은 어제가 처음인 것 같다. 세상의 중심이 나에게로 오면서 더욱 더 나는 나로 살게 된다. 조금 더디더라도 나라는 사람을 완성해나가는게 내 소명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사 내 바로 옆자리에 앉는 동생이 최근에 "언니. 최근에 좀 달라진 것 같아. 분위기가 완전 바뀌었어."라는 얘기를 해준 적이 있다. 여전히 혼자 있을 때 눈물이 흐를 때도 있고, 과거를 회상하다 씩씩대기도 하지만 여러 방면으로 많이 달라진 것은 나도 느끼는 부분이다. 동생의 얘기를 들으면서 위에 썼던 내용들을 공유해줬다. 이렇게 작은 것 하나씩 바꿔가다보면 나라는 사람이 꽤 많이 바뀌지 않을까 싶다. 달라져야만 하고, 달라지고 있으니 올해의 시작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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