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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별 May 20. 2024

오월 가정의 달에

가정(家庭) – 박목월 시 낭송


가정(家庭) – 박목월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 문 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 문 삼(六文三)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 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憐憫)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 문 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 문 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들깐 : 부엌 가까이 설치되어 주로 주방 용품을 보관하는 곳간을 이르는 경상도 방언이다.

    


시감상~~신발은 고단한 하루를 의미한다. 하루 동안 나를 데리고 다녔던 나의 신발, 그 아버지의 수고와 강아지같은 자녀들의 신발이 나란이 놓여있다. 시대적 차이를 느끼게 하는 신발 문수나 알전등같은 표현이 있지만 시 속에 녹아있는 아버지의 애틋한 가족애와 수고, 애환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시다.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 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憐憫)한 삶의 길이여.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아니 십구 문 반의 신발이 왔다.


박목월 선생님 고향 경주시 모량은 내 유년의 십년을 보낸 고향과 거의 같은 지역이다. 지금은 경주시라 불리지만 당시에는 같은 월성군이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 오빠들은 모량초등학교를 다녔고 나는 나중 생긴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우리 학교 교가 가사도 박목월 선생님이 지으셨다.      


학교 때 청록파 시인으로 배운 박목월(본명 박영종)은 1915년 태어나셨고 일제와 육이오를 겪은 세대이시다. 십 리길 들길을 따라 걸어서 통학했고 중학교 때에는 하숙비가 없어 학교 온실에서 가마니를 이불 삼아 덮고 잤다. 


일제 말기 조선어 말살 정책을 강요하던 때에도 그는 계속 시를 썼다. 쓴 시를 마루 밑에 감추었다가 밤이면 다시 꺼내어 쓸 정도로 시 쓰기에 열과 정성을 다했다. 어렸을 적 즐겨 불렀던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엄마 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 이 노래 ‘얼룩 송아지’ 는 그가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으로 17세 때 쓴 동시다.     

그는 1946년 조지훈, 박두진과 청록파(靑鹿派)를 결성하고 시집 청록집(靑鹿集)을 발간했다. 우리가 학교 때 달달 외우던 <나그네>란 시는 나도 지금 에사 제대로 음미를 하게 되니 그 시상과 시심 속으로 젖어든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선생님은 나무에 걸린 달이 이뻐서 목월이란 필명을 쓰셨다 한다.


'북 소월, 남 목월'이란 말이 있다. 김소월과 박목월의 이름자 뒷말로 맞춘 '월(月)'이다.

'향수'로 유명한 시인 정지용(1902-1950) 시인이 1940년 박목월을 문단에 추천하면서 “북에는 소월이 있었거니 남에 박목월이가 날 만한다"고 한 데서 유래됐다 한다.

평북 출생의 소월이 가락과 구성조가 있는 반면 목월은 경북 동쪽의 사투리와 함축성을 구사한다. 정지용은 목월의 섬세한 맛이 좋다며 목월의 시가 바로 한국시다, 라고 했다.     


한 여담이 목월 선생님이 반듯하기만한 선비가 아니라 또한 감성적인 천상 시인이었음을 나타낸다.    

  

1952년 6.25 전쟁이 끝나갈 무렵 박목월 시인이 중년이 되었을 때 그는 제자인 여대생과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버리고 종적을 감추었다. 가정과 명예, 그리고 국문학과 교수라는 자리도 버리고 빈손으로 홀연히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그 여인은 실상 부산 피난 시절 만난 사람으로서 두 자매가 같이 목월 선생을 사모 했지만 유부남이어서 언니는 포기하고 결혼을 하고 동생은 여대생이 되어 서울에서 다시 만나게 된 인연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목월의 아내는 그가 제주도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고 부인은 남편과 함께 있는 여인의 살아가는 궁핍한 모습을 보고 두 사람에게 돈 봉투와 따뜻하게 지내라며 겨울옷을 내밀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런 부인의 모습에 그 사랑을 끝내고 헤어지기로 결심한 목월이 서울로 떠나기 전날 밤 시를 지어 사랑하는 여인에게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그 시가 바로 가을밤이면 우리가 구성지게 부르는 이 노래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 ~ 아 ~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 ~ 아 ~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 두고 홀로 울리라/ 아 ~ 아 ~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이 외에도 아들인 박동규 교수가 전하는 그 어머니에 대한  다른 훌륭한 여담도 있다.

시를 쓰는 남편을 한 평생 뒷바라지 한 보이지 않은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까지도 불후의 시와 노래가 남게 된 것 같다. 진주가 조개의 상처로 만들어 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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