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 1840년 제1차 아편 전쟁 이후 유럽 열강에 의해 강제로 개항하였고 1930년대에 상하이는 아시아의 상업과 주요 금융 거점으로 번창하였다.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상해 임시정부로 더 각인된 곳이다.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암살’과 같은 많은 영화의 배경이 된 국제도시다.
그런 상하이의 위상이 1949년 공산당이 본토를 점령하면서 상하이 국제 무역이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로 제한되니 도시의 위상도 추락하였다. 그러다가 1990년대 흑묘든 백묘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덩샤오핑과 그를 이은 장쩌민의 경제 개혁으로 푸동 신구를 비롯한 상하이의 대대적인 재개발이 이루어졌다.
상하이는 다시 국제 금융 및 무역의 중심지로 재부상하였고 현재 상하이에는 뉴욕, 도쿄 다음으로 영향력이 있는 상하이 증권거래소와 상하이 자유무역 지대가 있다.
이제 상하이는 인구 2400만의 세계 최대 도시로서 관광 수입으로도 세계 일위라 하니 정말 인구 900만의 뉴욕과 비교되며 동양 아니 세계 최대의 도시라 해야 할 것 같다.
푸동공항에 내려 시내 호텔로 이동하면서 원래 사이즈로 말하는 중국이지만 크고 오래된 웅장한 건물에 눈이 절로 돌아갔다. 영국, 프랑스, 미국 열강들이 중국에 설치한 식민지역이었던 상하이는 150년 된 건물들이 즐비하다. '동양의 파리'란 말답게 유러피언 스타일의 건축물이 언뜻 뉴욕의 오래된 건물들을 오버랩 시킨다.
*여행 출발부터 위기
그렇게 반쯤 정신줄을 놓고 거리풍경을 보다 호텔에 도착해서 체크인을 하러갔는데 뭔가 싸아한 느낌! 아뿔싸 여권과 폰, 현금이 든 핸드을 놓고 내린 것이다. 여행하면서 이런 경우는 난생 처음이었다. 남편은 택시를 찾아갔지만 이미 우리가 내릴 때 바로 손님을 태워간 것을 나는 기억했다.
며칠 함께 하러 청도에서 날아온 시누 부부가 호텔에 먼저 도착해서 마중 나왔는데 난 ‘내 가방’ 만 외쳤다. 호텔 프론트 직원들도 서 너명 나와서 상황을 듣고 일단 공안에 신고부터 해야한다고 했다.
이전에 폰을 잃어버리고 그 안에 모든 비번이 다 있어 은행카드까지 다 취소했던 기억이 났다.
나는 폰 비번도 잠금장치도 없이 쓰니 더 황당하다. 무슨 폰이냐? 고 묻는데 SS 갤럭시폰 밖에 생각 안 난다. 여행 사진 잘 찍으려고 폰 바꾸고 아직 할부금이 들어가고 있었다.
다행히 인턴쉽으로 와 있는 인도네시아인 젊은 친구 가브리엘이 영어를 잘해서 소통이 되었다. 내 폰 계정을 묻더니 바로 비번을 설정하여 폰을 열지 못하게 하고 폰을 발견하는 즉시 자기폰으로 연락하라는 메시지만 뜨게 했다.
결국 두시간만에 택시기사의 연락을 받고 사태는 수습되었다. 사례금을 약속하고 이튿날 폰을 받았고 나는 외모도 깔끔하고 젠틀한 천사 같은 가브리엘이 고마워 떠나오면서 선물을 하고 돌아와서 숙소에 좋은 후기를 남겼다.
이번 여행의 절반 성공은 정말 좋은 숙소 선정이었다. 시누는 이전 스위스에서 베개밑에 둔 거액의 현금과 비싼 가방을 도난당했는데도 자국민 보호인지 제대로 조사조차 하지 않았다고 했다. 만약 내가 대충 그런 숙소에 묶었다면 스텝 직원들 서너명이 나서서 신속하게 조치할 수 있었을까? 중국은 관광지 입장시는 물론 기차를 탈 때도 여권제시를 해야하는데 우리 다섯명의 일정이 내 여권 재발급을 위해 다 망가졌을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호텔 아침 조식도 훌륭했고 무엇보다 위치가 시내 중심가 난징루에 있어서 걸어서 5분이면 인민광장에다 와이탄까지 난징동루로 통해 있어서 예원, 박물관, 다 걸어서 갈 수 있었다. 택시값이 비싸지 않다지만 주요명소를 그리고 쇼핑과 저녁식당등 다 연결이 되니 무척 편했다.
이렇게 출발부터 위기를 넘긴 상해 여행이 시작되었다. 늦었지만 시누 부부가 예약해둔 식당에 가서 마파두부, 동파육등 저녁을 맛있게 먹고 야경사진으로 유명한 와이탄으로 갔다.
*와이탄
와이탄은 역사적으로 외국인 거주지였기에 '外灘(와이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지역이 상해의 중국인 거주지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外灘'이 점차 '와이탄'으로 발음되고 표기되었다.
강변을 따라 늘어선 건물들이 오색 불빛의 야경으로 화려하기 그지없다. 넓은 강폭의 황토색으로 흐르는 황푸강이 마치 거대한 황룡이 살아 움직이는 듯 꿈틀대며 흘러간다.
상해 중심부를 관통하며 국제 무역과 물류의 요충지 역할을 해온 황푸강의 규모가 만만찮았다. 강 서쪽의 주로 은행들인 유럽풍 건축물들과 근래 경제개발 이후 강 동쪽인 푸동 지역에 세워진 동방명주와 최신의 고층빌딩들이 균형을 이루면서 와이탄은 상해의 대표적인 관광명소가 되었다.
뉴욕 맨허턴의 타임스퀘어가 뉴욕의 랜드마크로 하루 유동인구가 36만명이라 하는데 내겐 손바닥만해서 답답하게 느껴졌던 생각이 났다. 그기에 비해 와이탄은 활짝 펼쳐진 공간인데다 인파도 그에 못지않을 거 같았다.
함께 간 시누 남편은 해외 엔지니어로서 20년전 부터 상해를 와 보았기에 와이탄의 변화에 대해서 놀라워한다. 그간 와이탄 풍경은 많이 바뀌었고, 더욱 크고 웅장하고 깨끗하게 단장된 것이라 한다. 2000년대 이후 지난 20년간 와이탄 건너편 푸동의 호텔, 금융가 건물, 백화점 들이 동방명주 주변에 빼곡하게 들어차니 새 건물들이 강을 중심으로 맞은 편 고풍스러운 유럽식의 건물들과 양대산맥처럼 펼쳐진다.
동방명주는 동쪽의 진주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Oriental Pearl Tower다. 구슬(진주) 세 개를 바늘로 꿰어 놓은 듯한 외관이다. 상하이의 랜드 마크이자 푸동 지역의 상징이다.
그러나 밤을 화려하게 밝히고 있는 와이탄의 야경도 사실 이면에는 안타까운 민낯을 숨기고 있다고 한다. 화력발전소 관련 일을 하는 시누 남편은 지금 중국은 엄청난 전력부족난을 겪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전등불을 못 켜고 캄캄한 지역도 있다는데 이렇게 보여주기식 화려한 와이탄의 풍경은 어쩌면 현 정권의 장기정권 유지를 위한 전시와 과시가 아닌가? 라는 의구심이 든다 하니 그럴 수도 있다 한다.
와이탄 야경, 나는 특히 저 초록색이 이뻐 잠시 디즈니랜드인 듯 ㅋㅎ
왼쪽 동방명주랑 오른쪽 상하이 타워
만나자 마자 가방소동으로 미안했던 막내시누 부부와
이튿날은 예원을 감상했다. 명나라 때 관료가 부모를 위해 20년간 지었다는 건물과 정원이 아름다웠다. 직진하는 강시 접근을 퇴치하려 만들었다는 아홉 번 꺽인 다리, 구곡교도 보고 아들이랑 빨대 만두도 시식해보았다. 빨대로 육수를 빼 먹고 나니 속은 공갈빵처럼 텅 비어있고 야채도 고기도 없었다.
그리고 나서 낮의 와이탄을 보며 부둣가를 걸으니 어젯밤 화장한 거 같은 얼굴과는 다른 또 다른 순박한 웅장함이 있었다. 일단 거리가 깨끗하고 널찍해서 좋았다. 해저터널을 타고 강 건너편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예원에서 빨대만두 시식하는 아들, 혀 데일뻔 엄청 뜨거 ㅎㅎ
상해 음식은 해산물 천국, 특히 털게 튀김등 꼬치랑 거리음식점에서 다양한 걸 사 와서 먹을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