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다 -김누리
새 정부 출범 후 인사에 국민 추천 제도를 반영하여 실시했다. 국민주권정부로 함께 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임명 전이긴 하지만 좀 우려스러운 부분도 있다.
내란사태 후 지금은 야당이 된 국회의원들을 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인상이 과학이다’라는 말을 하게 되었다.
돌아가신 친정 부친은 사람은 나이 사십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 나이가 되면 타고난 외모가 아니라 살아온 인생이력의 이미지가 얼굴에 그대로 투영된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장관후보로 올라온 사람을 보는 순간, 어 이건 아닌데 싶어서 백년지대계인 교육을 담당할 인재로 왜 저런 사람이 발탁되었나 싶었다. 나름 속상해서 sns에 글을 올렸는데 댓글로 나의 감이 맞았음을 보여주는 정황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후보자가 논문을 표절했다고도 하고 현재 총장으로 있는 자기 식구 같은 학교 교수들부터 그녀를 반대한다는 말도 있었다.
대통령은 사회 통합과 협치를 바라며 이전 정권의 장관도 유임시켰다. 그리고 검찰개혁을 하자는 마당에 전 정권에서 충성한 검찰계 인사도 있지만 그런 부분들은 진영을 넘어서 두루 능력 위주의 실용주의 인사를 하겠다는 대통령의 의지라 본다. 그러나 그럼에도 교육 인사는 자라나는 새싹들부터 청년들에 이르기까지 아직 여물지 못한 우리의 미래세대를 보살피고 돌봐야 하는 일이기에 교육의 방향이나 실행에 있어서 더욱 섬세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본다. 해서 내정된 장관의 인성 검증이 서울대 10개를 만드는 성과나 능력 못지않게 중요하다 본다.
거짓말을 하거나 성공을 위해 기회주의적인 사람이 아니라 교육 철학이 보다 선명하고 명확한 사람이 교육계의 리더가 되어야 한다. 내가 현장교육에 임할 때 ‘19세기형 교실에서 20세기형 교사가 21세기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말을 하곤 했는데 그도 이제는 옛 말이다. 지금 우리는 2025년에 살고 있고 이제는 더 이상 입시란 목표로 아이들을 무자비하게 경쟁 구도 안으로 밀어 넣는 야만적 형태를 벗어나야 하고 그를 위해서 제도적 개선을 하기에 합당한 인물 위주로 인사가 이뤄져야 한다.
우리 부부는 둘 다 교사였지만 입시경쟁이란 거대한 체재로부터 벗어나 두 아들을 대안학교를 보냈다. 지금도 그 선택에 후회는 없지만 그만큼 우리 교육은 지나친 경쟁과 입시위주의 잘못된 시스템 속에서 운영되고 있다. 나는 국민 추천을 하지 않았지만 김누리 교수 같은 분이 교육계에 헌신하여 우리 사회에 점진적인 변화를 가져오길 바랐다.
그런데 후보로 올라온 사람을 보고 실망하여 내가 신뢰하는 야당 의원에게 대통령과 오찬자리에서 교육부장관 후보의 재검증을 요청해 달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고 나서 뉴스에 그날 오찬 중 비공개모임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다는 브리핑을 보았다. 꼭 내가 보낸 메세지 덕분일까 마는 어쨌든 나도 조금의 정치적 효능감을 맛보며 정말 잘못된 후보라면 청문회에서 바로 잡힐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하며 지켜보려 한다.
인사가 만사라는데 대통령이 혼자 완벽하게 다 잘할 수도 없고 인수위도 없이 출범하는 새 정부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니 주변의 참모들이나 전문가들의 말을 잘 듣고 후보 검증에 최선을 다 해주길 바란다. 나라 살림 정치에 어느 한 부분인들 중요하지 않을까마는 개인적으로는 30년 동안 몸 담았던 교육분야이기에 더욱 신경 쓰이는 것이 당연할 거다.
자녀는 모든 부모들에게 보물이요 아이의 몸은 부모가 돌보지만 그들의 영혼 양육은 교육이 하기에 부모라면 한 번쯤 일독을 권하며 함께 교육을 염려하고 개선을 바라는 마음으로 김누리 교수의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 라는 책을 소개한다.
나는 읽진 않았지만 그는 ‘경쟁교육은 야만이다’라는 책도 썼다.
1989년 독일로 유학을 떠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상황을 지켜보았던 저자는 경쟁 없는 학교, 등록금과 생활비 전액 무상 대학등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복지 정책과 사회적 정의가 자리 잡은 문화를 독일에서 처음 마주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나 또한 그보다 앞서 1986년부터 1990년까지 5년 동안 이웃 프랑스에서 외국인 유학생으로서 무상교육과 의료 복지등 각종 혜택을 누려보았기에 저자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한다.
식민 해방과 내전 후 잿더미 위에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룬 대한민국은 이제 국민소득 3만 불대에 진입할 만큼 부유해졌다. 일명 30~50 클럽이라면 소득 3만 불에 인구 5천만 이상의 나라를 말하는데 대한민국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태리, 일본등에 이어 8번째 나라로 그 그룹에 속한다. 정작 G7국인 캐나다는 인구 5천만이 안 되기에 다른 북유럽 나라나 호주처럼 30~50이 아니다. 땅 덩이가 넓어도 러시아, 중국도 국민소득이 못 미치니 30~50이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경제나 인구면으로는 지구상 8번째로 손꼽히는 우리나라가 정치, 사회 민주주의나 교육부문에서는 심각한 후진성을 가지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이다.
내가 프랑스에서 공부할 때 가끔 프랑스 친구들이 우리나라를 Little America로 놀렸었다. 처음엔 그 말이 거슬렸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인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우리의 서양화는 미국화였고 우리 근대화의 대부분이 미국으로 편향되었고 특히 해방 후 어쩌면 지금까지도 한국은 여전히 미국의 거대한 영향권아래 있으니까 말이다. 이승만 이후로 우리의 정치, 경제 각 분야도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어 왔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현 트럼프 정부하의 지금 미국을 보라. 그들은 청교도적 신앙의 기초와 자유 이념으로 건국되었다고는 하나 제대로 된 의료혜택은커녕 복지가 전혀 없는 자본주의의 민낯과 종결을 보여주는 형국이다. 그러니 유시민 작가나 김누리 교수 같은 독일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의 시각과 관점으로 우리 사회 전반에 지나치게 미국화된 잘못에서 벗어나 균형 잡혀야 할 때가 왔다.
저자는 한국은 작은 미국이라며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비판한다.
우리의 엘리트 대학 시스템과 과열된 입시 경쟁에서부터 엄청나게 비싼 학비와 과도한 사립대학체제까지 모두 미국의 제도와 관행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반면 유럽의 대다수 나라에서는 오래전 대학이 평준화되었고, 대학 입학의 기회는 폭넓게 열려 있고, 대학 학비는 저렴하거나 무료다. 독일 의대진학에서 성적은 20%만 적용된다.
그러니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이 사실은 미국식으로 편향된 사고요 사유이다. 심지어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감정, 욕망, 심지어 무의식까지도 미국인을 닮아있다며 저자는 이런 현상을 '영혼의 미국화’라고 비판했다.
정치 지형도 미국과 닮아 있어서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이 모두 보수정당이라 진보정당이 존재하지 않는데 우리도 진보라 할 수 있는 정당이 있지만 아직 아주 미미하다. 지금 민주당이 보수고 자칭 보수라는 국힘당은 사실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수구당에 불과하다 보면 그렇다.
한국이 미국화되었다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 미국이야말로 세계 최대 강대국이자 선진국이고 그것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고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른바 세계적 표준이 아니라는 데 있다. 유럽의 지식인과 정치가 사이에서 미국은 대체로 '사회적 지옥‘으로 여겨지는데 유럽 복지국가에서 살아본 사람으로서 이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다시 교육문제로 돌아가서 그러면 어떻게 아이들을 이 입시경쟁의 감옥에서 해방시킬 것 인가, 어떻게 이 학벌 계급사회를 부술 것인가? 저자가 독일과 유럽 사회를 거울로 삼은 이 책에 언급된 것 중에서 나는 성교육과 68 혁명의 부재에 관해 요약해보려 한다.
독일아이들에 비해 우리 아이들은 대부분 성(性)과 관련해서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성을 나쁜 것, 비도덕적인 것으로 악마화하거나 부끄러운 것으로 은폐하기 때문에 성에 대해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갖게 된다.
독일은 성과 관련해서 죄책감을 갖는 아이들이 거의 없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성교육을 체계적으로 실시하는데 흥미로운 것은 성교육의 첫 번째 원칙인데. '성과 관련 해서 절대 윤리적 평가를 해서는 안 된다'는 대원칙이다.
성이라는 것은 생명과 관계되고 인권과 관련된 중요하고 예민한 영역이므로, 성과 관련하여 충분한 책임 의식을 갖도록 가르쳐야 하지만, 그렇다고 성을 악마화해서 아이들의 내면에 죄의식이 생기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중요한 사안은 독일에서는 성교육을 가장 중요한 정치 교육으로 본다는 사실이다.
독일의 교육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민주주의 최대의 적은 약한 자아"라고 했는데 왜 한국에서는 이렇게 민주주의가 취약할까 고민하던 저자에게 이 말은 적잖은 충격과 깨달음을 주었다고 했다.
이 말은 민주주의를 하려면 구성원 하나하나가 강한 자아를 가진 성숙한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말인데 우리 교육이 자아를 강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성적으로 학생들을 줄 세우고, 다른 학생과 다르게 행동하거나 창의적인 생각을 드러내면 비판을 함으로써 열등감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아이들은 모멸감과 자괴감, 열등감을 일상적으로 느끼고 내면화하게 된다. 과연 이런 학교에서 강한 자아를 가진 아이들이 자라날 수 있을까? 한국인들의 자아가 약한 것은 자아를 유린하고 파괴하는 이런 교육 때문이라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교육을 자아의 문제로 환원해서 보면 한국 민주주의가 성숙한 민주주의로 한 단계 더 나아가려면 학교에서 강한 자아를 가진 아이들을 키워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정치학의 문제에서 심리학의 문제로 넘어가서 그것은 결국 성교육의 문제로도 귀결된다. 이는 성적 본능을 다루는 방식이 자아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자아, '에고(ego)'는
'슈퍼에고(superego)'와 '리비도 (libido)' 혹은 '이드(id)' 사이에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사회 규범이나 도덕을 의미하는 슈퍼에고와
본능과 충동의 세계인 리비도(혹은 이드) 사이에서 흔들리고 동요하는
불안한 존재가 바로 자아 ’에고 ‘라는 것이다.
자아, 즉 에고가 형성되는 시기는 곧 리비도가 발현되는 시기인 청소년기인데 이때 인간은 처음으로 리비도와 슈퍼에고 사이에서 분열된 에고를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리비도는 자연적인 현상이므로, 인간이 일정한 나이가 되면 이런 생물학적 충동을 느끼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성에 대해 억압적인 사회일수록 슈퍼에고가 리비도를 윤리적으로 공격하고, 악마화하여 성적 본능을 사회적으로 억압하고, 윤리적으로 나쁜 것으로 치부하는데 한국사회가 그러하다는 것이다.
성적 본능을 나쁜 것이라고 공격해도 리비도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슈퍼에고가 리비도를 공격 할수록 에고가 점점 더 강한 죄의식을 내면화하게 된다. 여기서 '죄의식'이라는 개념이 대단히 중요해지는데 바로 그것이 정치적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내 안에 버젓이 살아 있는 것을 악이라고 공격하면, 인간의 자아는 죄의식을 내면화할 수밖에 없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일종의 '성 정치학'이 탄생한다. 깊은 죄의식을 내면화한 인간일수록 약한 자아를 갖게 되고, 약한 자아를 가진 인간일수록 권력에 굴종적인 인간이 되기 때문이다.
아직도 우리 한국인은 경쟁을 당연시하는 사회에 살고 있고 특히 교육전반부를 차지하는 입시교육이 그러하다.
옛날 노예 감독관은 밖에서 채찍을 휘둘렀지만 지금은 스스로 자기 안에 노예 감독관을 심어놓고 자기 착취를 한다고 보면 한국은 세계에서 자기 착취가 가장 심한 나라이고 지나친 자기 착취가 '자기 계발'이라는 이름으로 끝없이 자행되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우리 사회가 그 많은 자살과 자해의 지옥이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하면 한국 사회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자살 사회'로 굳어진 것은 바로 한국 사회가 '자기 착취 사회'가 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이런 사회·심리학적 구조를 정확히 투시해야 하고 사회적 문제를 개인적 문제로 전가하는 지배자들의 기만적인 논리를 우리 스스로 통찰하고 극복해야 한다.
'설마 내 안에 노예 감독관을 심어놓았으랴' 하고 의심하는 분 들은 한번 실험해 보세요. 아주 간단합니다. 어느 햇살 좋은 날, 맛있는 커피도 마시고 멋진 음악도 들으면서 기분 좋은 추억을 또 어울리면서도 너 지금 뭐 하니 너 지금 이럴 때야? 내가 이러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뭐라도 열심히 하고 있을 텐데 이러고 있어도 되겠어. 하면 스스로를 족치고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의 노예 감독관이요. 바로 자기 착취입니다.
그런 식으로 쫓기면 일하는 한국인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기본적인 권리 그러니까 행복감을 느낄 권리마저 박탈당하며 살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 사회가 이처럼 자기 착취 사회가 된 것도 68 혁명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다 기 때문입니다. -127쪽
만약 나의 사유, 감정, 감수성, 욕망, 무의식이 나의 것이 아니라 나를 노예로 만드는 자의 것이라면, 나는 어떻게 거기서 해방될 수 있을까?
68 혁명은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학생과 근로자들이 일으킨 사회변혁운동이다. 여기에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겹치면서 프랑스 전역에 권위주의와 보수체제 등 기존의 사회질서에 강력하게 항거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이는 남녀평등과 여성해방, 학교와 직장에서의 평등, 미국의 반전, 히피운동 등 사회전반의 문제로 확산됐다.
이후 68 혁명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 독일 등 국제적으로 번져나가서 이른바 68세대는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정체성의 정치'에 이른다. 즉 '나를 이해하는 것이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고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구호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노예 감독관은 내 안에 있다'는 통찰로
68세대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허버트 마르쿠제는
"자유인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노예 상태에 있으면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
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노예 상태를 인식하는 것,
이것이 자유인의 첫 번째 조건인 것이다.
내 안의 노예 감독관은 나를 노예로 부리는 지배자들이 나의 내면에 심어놓은 것이고, 이것을 신념화하면서 나는 완벽한 노예로 길들여진다. 바로 여기에 '자기 착취'라는 놀라운 전도 현상의 비밀이 있다. 그러므로 자유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나라는 베트남전을 반대하는 미국에서도 함께 했던 68 혁명이 비켜갔다. 박정희는 경제적 원조와 그 자신 권력을 잡기 전 좌익출신이라는 미국 지도부의 우려 섞인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격 베트남 파병을 실행했던 세계 유일한 국가 지도자였다. 그는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베트남 전쟁에 전투 부대를 파병였다.
이제 우리는 두 번씩이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뤄내면서 세계가 칭송하는 정치 민주화도 이루었다. 김누리 교수는 우리 사회에 68 혁명이 없었기 때문에 바로 그런 이유로 대략 50년 정도 문화 지체 현상을 보이고 있다고 했다. 솔직히 나 또한 86년 프랑스 사회를 보면서 아무리 우리 경제가 급성장을 해도 프랑스식 복지국가를 이루며 선진화된 의식을 가지려면 적어도 50년은 족히 걸리리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68년 프랑스 학생들은 우리는 공부하는 기계가 아니다고 외치며 프랑스 학벌 체제의 정점에 있던 소르본 대학의 해체를 주장했고 그 결과 소르본 대학은 실제로 해체되었다. 파리 1 대학에서 10 대학까지 대학체제의 전면적인 재편이 이루어짐으로 학벌체제를 무너뜨렸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학생이 자신을 해방시켰는데 아직도 우리의 현실은 어른들이 학생들을 노예 상태로 묶어두고 있다. 나도 저자와 마찬가지로 학생들이 우리 사회의 '마지막 노예'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어린 학생들을 보면 연민과 동정이 생기니 어른들은 이를 각성하고 교육을 다시 생각해야 하고 이제 투표권을 가진 한국의 청소년들도 자신의 노예 상태에 대해 정치적 자각을 함으로써 자신들을 옥죄고 길들이는 학벌 사회에 저항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