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돌아가기
루앙프라방의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며 하늘을 주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낮게 펼쳐진 이국적인 건물들의 지붕과 강가의 나무들은 이제 노을빛을 머금고 반짝였다.
이곳의 바람은 여전히 더위를 품고 불어왔지만, 하루의 끝이 가까워질수록 공기에는 미묘한 서늘함이 스며들었다.
낮동안 뜨겁게 달구어졌던 돌바닥도 어느새 온기를 덜어내고 있었다.
낯설던 골목길도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느껴졌고 마치 오랫동안 머물렀던 거리처럼 편안했다.
하지만 그 익숙함이 의미하는 것은 이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루앙프라방을 닮은 조심스럽고 느린 걸음으로 노을빛에 물들어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게만 타오르던 태양이 하늘과 만나 서로의 색을 조화롭게 섞어냈다.
조금씩 저물어가는 태양이 잔잔한 강물 위로 길게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강가에 앉아 노을을 기다리는 사람들, 짐을 잔뜩 실은 자전거를 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현지인들의 실루엣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그 풍경들 속에서 문득, 이 여행도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했다.
내일 밤이면 라오스를 떠나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했는데, 어느새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모래알처럼 남은 순간이 얼마 되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마치 오래된 엽서처럼 느껴졌다.
한 장, 한 장 이곳의 모습들을 기억 속에 남겨두려 애쓰며,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숙소에 도착하자 처음 우리를 방으로 안내해 준 닉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손님을 맞이하고 배웅하는 일이 그의 일상이었을 텐데도 우리와의 작별인사에 소홀하지 않았다.
그의 짧은 인사 속에는 이곳에서 보낸 시간들이 담겨있는 듯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정들었던 공간과 사람을 떠난다는 것은 언제나 아쉬운 일이었다.
그는 두 손을 모아 인사를 했다.
마치 다시 만나기를 바란다는 듯 가지런히 모여있는 두 손이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나는 같은 마음으로 손을 모아 답례했다.
여행에서의 이별은 늘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짧은 순간 스쳐 지나갔던 인연들이 시간이 지나면 기억 속에서 희미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만은 영원히 진심으로 남을 것이다.
툭툭을 타고 다시 기차역으로 향하는 길, 해 질 녘의 루앙프라방은 놀랍도록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황금빛 햇살이 강을 따라 반짝이고, 가게들은 하나 둘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는 현지인들의 모습도, 느긋하게 길을 걷는 여행자들의 걸음도 모두 이 도시의 풍경 속의 일부로 자리 잡혀 있었다.
덜컹이는 트럭 뒷자리에 앉아 진동을 느끼며 점점 멀어지는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던 이곳이 다시 낯설게 느껴졌다.
여행은 늘 그렇다.
머무를 때는 동네의 골목길처럼 익숙지만, 떠나는 순간부터 그곳은 다시 새로운 장소가 된다.
기차역에 도착하자,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우리는 들어가기 전 간단한 간식들을 조금 구입하기로 했다.
이번에도 역시 ‘과자 탐지기‘ 민정이가 나섰다.
초코맛일 것이 분명한 과자들과 달콤해 보이는 과자 몇 봉지를 진열대 사이에서 집어 들었다.
투박한 봉투를 가득 채운 과자봉지들을 받아 들고 플랫폼으로 향했다.
기차역에서는 방비엥에서와 마찬가지로 공항 보안 검색과 같은 짐 검사를 거쳤다.
가방을 스캐너에 밀어 넣고 금속 탐지기 사이를 지나는 일은 괜스레 긴장을 하게 된다.
이번에는 어렵지 않게 통과하고 난 뒤 비어있는 의자에 한 줄로 자리 잡고 앉았다.
기차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티켓에 쓰여있는 출발 예정 시각과 가까워졌지만 도착예정인 열차는 전광판에 보이지 않았다.
전광판의 출발시간이 조금씩 뒤로 밀려가기 시작했다.
기차가 연착되고 있는 것 같았다.
기다림이 길어졌지만 우리는 지루할 틈이 없었다.
휴대폰을 꺼내 함께 찍은 사진들을 넘겨보았다.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은 모습, 햇살 좋은 오후를 담은 사진, 네잎클로버를 발견하고 기뻐하던 순간들.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차가운 물속에서 밝게 웃고 있는 사진이 눈길을 끌었다.
그날의 우리는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 장난스럽게 포즈를 취하며 웃던 모습, 세차게 내리는 비 사이로 스티로폼 조각을 쓰고 깔깔 대던 순간들.
마치 5년 전의 청춘들과 같았다.
피곤한 얼굴로 플랫폼에 앉아 있는 지금의 우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도 청춘이라는 것이 눈부시게 빛을 냈나 보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그때의 나는 모르고 있었지만.
붉은빛은 아니지만 다른 색으로 반짝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지금 이 순간도 훗날 기억했을 때 똑같이 빛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여전히 여행 중이고 지금 이 순간도 언젠가는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을 테니까.
청춘이 빛나고 있는 시간은 그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 수 있는 것 같다.
청춘이라는 빛은 별빛과도 같아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야 만 우리 눈에 보이게 된다.
불과 몇 시간, 몇 분 전에 빛난 것도 눈치채기 힘드니까.
사진을 넘기며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순간만큼은 기차가 늦게 오는 것도, 기다림이 길어지는 것도 상관없었다.
드디어 기차가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플랫폼에 울려 퍼졌다.
우리는 사람들 속에 섞여 기차로 향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티켓에 쓰여있는 번호에서 올라타니 자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창밖으로는 서서히 루앙프라방의 밤이 펼쳐졌다.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반짝이는 불빛들, 가끔씩 지나치는 작은 마을, 밤하늘보다도 더 어둡게 자리 잡은 깊은 숲 속까지.
창밖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이 여정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출발할 때와는 다르게, 기차 안의 공기는 한결 차분했다.
우리는 창문 너머로 사라져 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앉아있었다.
민아는 빠르게 잠에 들었고 나 또한 눈꺼풀이 무거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비엔티안이 가까워질수록 내일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5년 전,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미처 자세히 보지 못했던 도시.
다시 마주할 거리와 풍경들.
조금 더 선명해질 비엔티안의 모습이 궁금했다.
같은 장소를 다시 찾을 때의 묘한 감정을 곧 마주할 것이다.
설렘과 아쉬움이 뒤섞인 채, 우리는 다시 처음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