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_노란색 친절

비엔티안에서 만난 빗방울

by 한경환

각자의 자리에서 짐을 풀었다.

이제는 익숙하게 목욕용품과 갈아입을 옷 등을 미리 꺼내두었고 나머지 짐들은 한쪽으로 몰아 정리해 두었다.

여러 번 짐을 챙겼다 풀었다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익힌 행동들이었다.

여행은 우리에게 머무는 법만큼이나 떠나는 법을 알려주려 한다.


이곳은 우리 여행의 마지막 숙소였다.

우리가 이곳에 머무는 시간은 고작 하루일 뿐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흘러갈 모든 순간들은 또 하나의 기억이 되어 우리 안에 자리할 것이다.

침대 옆의 캐리어를 모아두고 각자의 가방에서 꺼낸 루앙프라방 맥주를 냉장고에 넣으며 여행의 마지막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의 설렘과 어색함이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공기와 향기로 남아 있었다.


낯선 도시에서 보낸 시간들, 그 속에서 마주한 풍경과 사람들, 뜨거운 햇살 아래 천천히 걸었던 골목길들.

모든 것이 아련하고도 선명했다.

여행은 언제나 현재형이지만 끝이 다가올수록 과거형으로 바뀌어가는 시간들이 손에 잡힐 듯 보이게 된다.

마치 모래시계 속 모래알이 마지막 몇 알 남았을 때, 유난히 선명하게 보이는 것처럼.

이 순간이 빠르게 과거가 될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같은 속도로 하루를 살아가는 것.

이것 또한 여행의 방식일 것이다.


짐을 모두 정리하고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살짝 걷었다.

멀리서 여전하게도 비엔티안의 밤이 반짝이고 있었다.

넘실 대는 불빛, 일렁이는 누군가의 이야기들.

저 빛들 속에서 우리가 만나게 될 이야기들은 무엇일까.

아껴읽던 책의 아직 펼쳐지지 않은 페이지처럼, 남은 시간 동안 쓰일 이야기들이 궁금했다.


숙소를 나서자 비냄새가 섞인 바람이 불어왔다.

비엔티안의 밤을 즐기기 위해 한껏 차려입은 우리의 피부 위에 한결 선선해진 공기가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어두운 골목길을 빠져나가자 서서히 도시의 밤이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택시에서 바라보았던 풍경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거리에는 오토바이들이 쉴 새 없이 지나가고, 가게마다 환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노점에서는 고소한 기름냄새와 향신료의 지은 향기가 어우러져 코끝을 간질였다.

한 걸음 한 걸음, 이 도시에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골목 끝, 흐릿한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길거리 음노점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강가를 따라 길게 이어진 음식점들이 줄지어 있었다.

노점과 식당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밤을 준비하고 있었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있었다.

그 옆을 지나며 우리는 늦은 식사로 무엇을 먹을지 고민했다.

온갖 해산물과 동남아 특유의 음식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박스 안에는 살이 통통하게 오른 새우와 게, 싱싱한 생선들이 줄지어 누워 있었다.

그 옆의 커다란 쟁반 위에는 조개와 홍합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강한 불길 위에서 달궈진 철판 위로 마늘과 신선한 야채들이 가득 올려진 새우가 지글지글 익어가고 있었고 숯불 위에는 커다란 생선과 두툼한 고기들이 노릇하게 구워지고 있었다.

그 음식들은 단순한 요리가 아닌, 이곳의 밤을 빛내는 하나의 풍경 같았다.


여러 매장이 있는 만큼 우리는 신중하게 선택했다.

어느 가게는 해산물이, 다른 가게는 육류가 메인이었다.

그리고 같은 음식들이라도 조금씩 가격이 다른 듯 싶었다.

우리는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가게를 골랐다.

강가 쪽으로 난 테이블을 잡아 시원하게 탁 트인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였다.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 위로 가로등 불빛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물결이 가볍게 일렁일 때마다 빛도 함께 흔들렸다.


음식을 기다리며 우리는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의 배를 채워줄 음식에 대해서, 이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무엇이었는지, 내일 이곳을 떠나야 하는 아쉬움까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바람은 끊임없이 불어왔다.

그 바람에는 어딘지 모르게 촉촉한 비냄새가 묻어온 듯했다.


그리고 음식이 테이블 위에 올라온 순간 첫 번째 빗방울이 함께 떨어졌다.

아주 작은 빗방울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직원분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다.

지구언은 우리를 바라보더니 밝은 미소를 지으며 안쪽으로 자리를 옮겨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잠시 고민하던 우리는 방비엥에서 쏟아진 비를 기억하며 접시를 들고 안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거센 빗줄기가 쏟아졌다.


비는 무섭도록 세차게 내렸다.

얇은 천막 위로 떨어진 빗방울이 쉼 없이 퍼져 나가며 작은 물결을 만들었다.

물방울들이 바닥에 부딪혀 튀어 올랐고 바람은 여전히 세차게 불었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강물 위에도 수없이 많은 원이 그려졌다.

하지만 우리의 저녁은 조용히, 그리고 따뜻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빗소리를 들으며 따뜻한 국물을 떠먹었고 바삭하게 튀겨진 이름 모를 튀김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뜨겁고 짭조름한 국물과 부드러운 고기가 입안에서 퍼지는 순간, 쏟아지는 빗소리는 오히려 배경 음악처럼 들려왔다.

비는 우리를 멈추게 했지만 덕분에 우리는 또 한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테이블 위는 어느새 면 요리, 튀김 요리, 볶음 요리, 그리고 고기 한 접시가 놓여 있었다.

배가 고팠던 만큼 거침없는 젓가락질이 시작되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 순간이 더없이 행복했다.

전에도 우리는 이렇게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린 순간이 있었다.

비슷한 기억이 이 순간 위로 오버랩되며 마치 오래된 추억처럼 비쳤다.

그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우리의 여행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간질간질.

아, 마음을 긁는 순간이다.

여전히 생생한 기억들을 꺼내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함께 쌓은 추억 위에 함께 나눈 이야기를 감싼다.

덜컹이던 툭툭, 그것보다 더 덜컹이던 버기카, 우리의 이야기는 비를 타고 이어졌다.

비가 내리던 순간들.

여행에서 나쁜 일은 생기지 않는다.

돌아보면 어느샌가 추억으로 변하게 될 순간들만 있을 뿐.

그리고 그런 일들은 분명 더 선명한 추억으로 남게 된다.


식사를 마친 후에도 비는 그칠 기미가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당황하지 않는다.

비가 내린다면 그저 맞는 수밖에.

여행에서 만난 비는 그저 우리를 적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장면이 되고, 이야기가 되고, 시간이 지나면 차가운 빗방울마저 따듯한 기억이 된다.


우리는 계산을 마치고 택시를 불렀다.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비는 그칠 기미를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

택시는 금방 매장 앞으로 도착했다.

심호흡을 하고 택시까지 전력질주를 하려는 순간 가게의 주인아주머니가 다가왔다.

아주 커다란 노란색 우산을 들고.

그녀는 조용히 한 명, 한 명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택시까지 데려다주었다.

우리는 연신 “컵짜이”를 외쳤고 그녀도 또한 같은 말로 보답했다.

그리고 환하게 웃었다.

노란 우산 아래에서 빛나는 그녀의 미소가 마치 작은 햇살 같았다.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어두운 밤 중에도, 그녀의 미소는 마치 우리가 다시 찾은 청춘처럼 따듯하고 환하게 빛났다.

택시는 천천히 빗속을 가로질러 달렸다.

차창 너머로 노란 우산 아래의 그녀가 점점 멀어졌다.

그녀의 미소는 보이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우리 안에 남아 있을 것이다.

어느 날, 다시 비가 내리는 밤이 오면, 그 안에서 누군가의 친절과 마주하게 된다면 우리는 아마도 이 노란색 따뜻했던 미소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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