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닐라 부티크 호텔
기차에서 내리자 비엔티안의 공기가 가장 먼저 반겨왔다.
한낮의 공기가 차분히 가라앉은 듯한 공기가 살며시 피부를 어루만졌다.
기차역의 내부는 사방이 낯선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루앙프라방의 고즈넉한 풍경에 익숙해진 탓일까.
이곳은 전혀 다른 세계 같았다.
웅장하고 넓은 현대적인 건물, 휘황찬란한 조명, 넓디넓은 대리석 바닥.
마치 시간의 틈을 비집고 다른 나라에라도 도착한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이질감 속에서도 여행자는 다시 길을 찾고 새로운 곳에 발을 디디는 법을 배워가는 존재였다.
각자의 캐리어를 끌고 사람들 틈에 섞여 걸으며 역을 빠져나왔다.
흘러가는 무리들 속에서 자연스레 발걸음을 맞췄지만, 마음은 여전히 루앙프라방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익숙해질 만하면 떠나야 하는 것이 여행이라지만, 그 익숙함이 주는 따스움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이병을 아쉬워하는 것도 잠시, 기차역을 나서자마자 느껴진 공기에 더는 그리워만 할 수는 없게 되었다.
차갑지는 않지만, 선선하게 스며드는 밤공기가 몸을 감쌌다.
뜨겁고 축축한 열기 속에서 하루를 온전히 보낸 탓인지, 이 작은 기온 차이가 이렇게나 크게 다가왔다.
거리의 공기는 다른 계절을 품고 있는 듯했다.
같은 나라, 같은 시간 속에 있었지만 이곳은 확실히 루앙프라방과는 달랐다.
도시는 밤이 되어서야 본연의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았다.
기차역 앞에는 택시를 잡으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여행자들도 현지인들도 저마다 어디론가를 향해 분주히 움직였다.
택시 기사들은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값을 흥정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그들의 택시에 짐을 싣고 있었다.
나 또한 조용히 어플을 이용해 택시를 불렀다.
어플에서 추천한 금액을 그대로 입력하는 실수는 두 번은 하지 않았다.
이곳에서의 첫날 배운 것이었다.
이번에는 그 가격보다 조금 저렴한 금액으로 택시를 불렀다.
예상대로 수많은 택시들이 조금 높은 가격으로 내게 제안을 건넸고 조금 기다리니 내가 올린 가격을 그대로 하겠다는 기사분과 매칭을 성공할 수 있었다.
여행에서의 가격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그것은 낯선 이들과 나누는 침묵 속의 타협이자 배움이었고 경험이었다.
소리 없는 흥정이 끝나고 우리는 금세 도착한 택시 트렁크에 짐을 싣고 있었다.
이제 또 다른 도시가 눈앞에 펼쳐질 차례였다.
도로는 한산했지만 택시는 여유 넘치게 천천히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첫날처럼 답답하거나 조급하지 않았다.
이건 라오스의 속도였다.
그리고 우리가 배워야 할 여유였다.
이 여유 안에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라오스가 내게 가르쳐 준 것이었다.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차창 너머로 밤의 풍경이 흘러가고 있었다.
비엔티안의 거리는 환한 조명 아래 선명하게 드러났다.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감춰져 있어 직접 찾아내야 했던 루앙프라방과 달리, 이 도시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곳곳에는 높은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곳곳에 커다란 간판들이 반짝였다.
길가의 가게들은 저마다 불빛을 밝히며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고 오토바이와 자동차들이 조용히 교차로를 지나갔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거리의 풍경들이 빠르게 바뀌었다.
우리의 호텔이 중심가에서 아주 조금 떨어져 있는 탓이었다.
열린 식당에서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고 작은 노점에서는 늦은 저녁을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가벼운 차림의 여행자들이 길거리 음식을 손에 쥔 채 걷고 있었고, 그들 뒤로는 반짝이는 간판들이 밤하늘을 배경 삼아 서로를 뽐내고 있었다.
새로운 도시의 밤은 이렇게나 생동감으로 눈이 부셨다.
택시는 조그만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화려한 거리의 불빛이 점점 멀어지고, 고요한 어둠이 차 안을 감쌌다.
숙소 앞에 도착하자 사진으로 보았던 그곳과는 사뭇 다른 모습에 우리는 서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예상보다 작은 규모와 아담한 입구.
그리고 우리가 가장 기대했던 수영장은 웅장한 인피니티 풀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린아이들이 첨벙거리며 놀기에 적당할 정도로 작은 물웅덩이 같은 크기였다.
우리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혹시 옥상에 수영장이 하나 더 있을까라는 기대로 체크인을 하며 물어봤지만 대답은 간결했다.
“We have only one pool.”
체크인을 마치고 키를 받아 들었다.
안내를 따라 이동했지만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 이곳은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각자의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올라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의 숙소가 2층이라는 것.
사실 애초에 이 건물은 3층짜리 건물이었다.
피곤한 기색은 역력했지만 이상하게도 불평은 나오지 않았다.
이런 작은 차이마저도 결국에는 추억이 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긴장한 채로 문을 열자 다행히도 방은 사진과 똑같았다.
튼튼한 2층 침대와 넓은 침대.
사진과는 전혀 달랐던 로비나 수영장과는 달리 이 공간만큼은 사진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정확하게 우리가 기대했던 모습이었다.
여행이라는 것이 그렇다.
예상과 그대로 들어맞을 때도 있지만 그와 반대의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짐을 내려놓고 각자의 침대에 몸을 던졌다.
창밖 멀리에서는 여전히 비엔티안의 밤이 빛나고 있었다.
하루를 돌아보며 잠시 눈을 감았다.
이곳에서의 시간도 언젠가 또 하나의 기억이 될 것이다.
지금은 그저 이 밤의 공기를 온전히 느끼고 싶었다.
청춘은 여행과 닮아 있다.
여행을 즐기는 그 시간이 얼마나 찬란한지 모른다.
함께 웃고 함께 걸으며 보낸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는 것은 언제나 시간이 지난 후다.
별빛이 오래된 과거의 빛을 우리에게 보여주듯, 청춘도 시간이 지나서야 그 빛을 알아차리게 된다.
루앙프라방을 떠나며 남겼던 풍경, 기차에서 나누었던 대화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공기까지.
그것들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또 하나의 별빛이 되어 우리 안에서 반짝일 것이다.
지나간 후에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오늘 밤을 충분히 담아두어야겠다.
지금의 이 밤공기가 그리워질 또 다른 어느 날의 밤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