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남긴 것
숙소로 돌아가는 길.
우리는 배부른 몸을 눕히기 위해 택시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창밖으로는 빗방울이 쉼 없이 쏟아졌다.
가로등 불빛이 비에 젖은 도로 위에서 길게 번지고, 그 위로는 빗물이 촘촘히 흐르며 비엔티안을 어루만졌다.
유리창을 타고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빗물을 따라 불빛들이 몽글몽글 번져갔다.
“아, 진짜 배부르다.”
누군가 힘들다는 듯 말했다.
짜증이 섞인 말이 아닌 아주 만족스럽다는 어투였다.
대답 대신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배가 부르면 몸이 나른해진다.
깊은 포만감 속에서 우리는 말수가 줄었고 조용히 비엔티안의 밤을 감상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은 잠에 들 듯 흐릿하게 변해갔다.
재잘거리며 걸었던 거리들이 비를 맞으며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차 안은 빗소리로 가득했다.
빗방울들이 지붕과 유리창을 두드리며 리듬을 만들었고 그 리듬 속에서 우리는 묵묵히 저마다의 생각에 잠겼다.
지금 이 순간 또한 여행의 일부라는 것, 그리고 우리는 그 여행의 막바지에 다다랐음을 알고 있었다.
고요한 공간에 빗소리와 가사를 알 수 없는 노래만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숙소에 도착한 우리는 차례로 씻었다.
민아는 아직 남은 습기를 머금은 바깥공기를 맡고 싶어 발코니에 서 있었고, 민정이는 먼저 침대에 누워 오늘 찍은 사진을 넘겨보고 있었다.
뜨거운 물이 어깨를 감싸는 동안, 하루의 순간들이 한 장씩 떠올랐다.
뜨거운 태양 아래를 걸었던 것, 시원한 과일주스, 맛있었던 빙수, 혼잡했던 기차역, 흠뻑 젖은 거리까지.
어느새 또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
다시 돌아온 비엔티안에서 밤을 맞이했다는 것은 곧 이 여행은 마지막 하루만을 남겨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쉽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아쉽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마음 구석구석에 남아있는 무언가가 참 많은 여행이었으니까.
게다가 아직 하루가 더 남아있는걸.
쏟아지는 수도꼭지를 잠근 뒤 물기를 털었다.
이제 샤워실을 나가야겠다.
뜨거운 물을 맞는 일은 정말 좋아하는 일이지만 이 샤워실 밖에는 또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을 테니까.
샤워 후의 선선한 공기가 몸을 감사자, 하루가 온전히 끝났다는 것이 실감 났다.
민정이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었고 세희는 바닥에 앉아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저마다 편한 곳에서 편한 자세로 몸을 기댔다.
하루를 온전히 보낸 몸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벌써 잠에 들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조금만 더 붙잡고 싶다는 마음이 어딘가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맥주 마실 사람!”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반가운 미소들이 입가에 떠올랐다.
냉장고에서 조심스럽게 꺼낸 병들이 바닥에서 달그락 소리를 냈다.
루앙프라방에서 챙겨 온 루앙프라방 맥주.
낮에 이 맥주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 또다시 떠올랐다.
병을 따는 순간, 탄산이 부드럽게 터졌다.
연한 황금빛 액체가 찰랑이며 빛났다.
4개의 유리병이 가볍게 부딪혔다.
그 유리병 너머로 서로의 얼굴이 비쳤다.
꿀꺽꿀꺽.
라오비어보다 조금 더 부드러운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목을 타고 천천히 넘어가는 이 감각이 우리가 떠나온 루앙프라방을 꼭 닮아 있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오래 머물고 싶은 곳, 강렬하진 않지만 깊숙이 남는 향기.
루앙프라방은 그런 도시였다.
그곳에서는 모든 순간이 부드럽고 잔잔하게 스며들었다.
“제법 맛있는데?”
저마다 긍정적인 평가가 쏟아졌다.
맥주가 맛있는 순간은 아마도 그날이 좋았던 순간일 것이다.
피곤하지만 행복한 밤, 온몸이 여행의 공기를 머금은 채 함께 있는 이 순간.
아마 이 맥주를 사들고 한국의 어느 날엔가 다시 맛을 본다면 지금 맛의 반도 따라오지 못할 테지.
맥주는 이야기를 불러온다.
맥주가 목을 타고 흘러간 지금, 우리의 입에서는 또다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오늘의 가장 좋았던 순간들에 대해, 기억에 아직도 생생한 장면들에 대해, 그리고 다가올 내일에 대해서.
“내일이 마지막 날이라니!”
말이 끝나자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익숙해진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
이제 곧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
“시간 진짜 빠르다.”
“우리 또 다 같이 여행 갈 수 있을까?”
“같이 갈 수 있겠지?”
희미한 걱정과 기대가 뒤섞였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언제 또 떠날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미래에 대한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적어도 오늘 함께한 기억들은 남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맥주를 반쯤 비운 채, 우리는 말없이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희와 민아는 침대로 들어가 누웠다.
창문 틈으로 빗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빗소리는 생각에 잠기게 하는 힘이 있다.
여행의 끝자락, 우리는 무엇을 얻었을까.
처음으로 휴식이나 경험이 아닌, 무언가를 찾기 위해 떠난 여행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고민하던 청춘의 해답을 얻었다.
우리는 종종 청춘을 시간이 정해진 한 시절이라고 생각한다.
젊고, 뜨겁고,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때라고.
하지만 여행을 하며 만났던 순간들은 달랐다.
그저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감탄하는 순간.
냇가에서 마주친 작은 행운에도 들떠 웃음을 터트리는 순간.
낯선 도시에서 익숙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편안함을 느끼던 순간.
그 순간들이 모여 우리의 시간을 빛나게 했다.
청춘은 우리가 얼마나 젊은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순간을 보내고 있느냐로 결정되는 것이었다.
아무리 젊고, 아름답다한들 흘러가는 순간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것은 청춘이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젊음의 한 때일 뿐.
어느새 시간은 깊어 있었다.
맥주는 바닥을 보였고 눈꺼풀은 점점 무거워졌다.
세희와 민아는 이미 각자의 침대에서 잠이 들어 있었다.
조용한 숨소리가 방안을 가득 매웠다.
여행의 마지막 밤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끝을 천천히 음미하고 있었다.
민정이는 누워서 핸드폰을 보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아직 켜져 있는 핸드폰이 민정이의 감긴 눈을 비추고 있었다.
창밖에는 여전히 빗소리가 퍼지고 있었다.
잘 자, 얘들아.
잘 자, 비엔티안.
여행의 시작을 알리던 인사가 이제는 여행의 끝을 장식하고 있었다.
아쉬움과 포만감, 피곤함과 따듯함, 그 모든 감정이 뒤섞인 채로, 그렇게 라오스의 마지막 밤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