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_낯선 사람으로 오다 - 친구로 떠나다

여행에서 나쁜 일은 생기지 않는다.

by 한경환

호이안에서의 마지막 날. 오늘을 어떻게 보내면 좋을까에 대해 한참을 고민했었다. 이미 올드타운을 다녀온 뒤라 지루해할 것 같아 오늘 하루를 오전과 오후로 나눠 계획을 짰다. 오전에는 올드타운에서 구경을 하고 돌아와 쉬었다가 오후에는 안방비치에서 저녁을 먹는 코스다.


오늘도 어김없이 엄마와 이모의 속삭이는 소리에 눈을 떴다. 두 사람은 예상대로 창가에 앉아 풍경을 보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내가 일어난 것을 보자마자 배고프다며 아이처럼 보챘다. 오늘의 조식은 뷔페식이 아니라 정해져 있는 아침메뉴들을 골라서 주문하는 것이었는데 주말에는 뷔페식으로, 평일에는 이렇게 운영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다행히 여러 번 주문해도 상관없었다. 우리는 종류별로 주문해 보고 그다음부터는 맛있었던 메뉴들로만 주문을 했다.

오늘의 조식

점심과 저녁 메뉴를 이미 정해놓았으니 배를 채울 정도로만 먹기로 했지만 눈앞에 음식을 두고 그런 약속 따위 생각이 날 리가 없다. 한참 동안이나 식사를 하고 나서야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우리는 잔뜩 부른 배를 부여잡고 바로 나갈 준비를 했다. 엄마는 가져온 옷을 모두 꺼내놓고 거울 앞에서 계속 고민했다. 모든 옷을 몸에 대보 고나서야 마침내 흰색 패턴이 들어간 네이비색 원피스로 결정했다. 그때 화장실에서 나온 이모가 소리쳤다.



“언니, 나도 비슷한 옷 챙겨 왔는데!”



두 사람은 텔레파시가 통하는 게 분명했다. 한국에서 따로 챙겨 온 짐가방에 비슷한 옷가지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심지어는 둘 다 비상시에 쓸 케이블타이까지 챙겨 왔다! 이제껏 여행하면서도 단 한차례도 필요하지 않았고 가지고 다니는 사람도 본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또다시 비슷한 옷을 입고 나간 두 사람을 보자 프런트 직원들은 다 알고 있다는 듯 미소 지으며 셔틀로 안내해 주었다. 버스는 한적한 거리를 달려 우리를 올드타운으로 데려다 놓았다. 버스 문이 열리자마자 이모와 엄마가 먼저 뛰어나간다. 몇 번이나 와보았기에 이제는 우리 동네 같다며 앞장서서 걸었다.

앞장서서 걸어가는 두 사람

올드타운의 모습은 매 시간마다 달라진다. 물론 모든 시간이 아름답지만 그중 내가 특히 사랑하는 시간이 바로 지금이다. 잔뜩 꾸며진 화려한 조명도, 관광객들도 별로 없고 그들을 따라다니는 호객꾼들도 없는 올드타운의 완벽한 민낯을 볼 수 있는 시간이다. 조용하고 한산한 거리에 엄마와 이모도 어제 그곳이 맞냐며 신기해했다. 여유롭게 구경을 하며 사진을 찍고 뷰가 좋기로 유명한 카페에 들렀다. 높은 건물이 별로 없는 곳이라 이곳에 올라오니 올드타운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아름다운 경치 때문인지 우리가 올라왔을 때는 한 커플의 웨딩촬영이 한창이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만으로도 사랑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예쁜 모습이었다. 우리는 각자 차 한잔씩을 주문했다. 차가 나오기 전까지 루프탑과 아래층을 구경하고 사진을 찍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멀리에서 구름이 조금 보였지만 신경 쓸 만큼은 아니었다.

올드타운이 한눈에 보이던 루프탑

티타임 후에 우리는 어제 야시장이 있던 곳에 가보기로 했다. 두 사람은 호이안에서의 마지막 날이라는 이야기에 이곳 구석구석을 눈꺼풀에 단단히 새기려는 것처럼 열심히 구경했다. 나 또한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아쉬워 카메라에 담고 있을 때였다.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두 사람은 자전거를 타고 있는 베트남 학생들과 두 사람이 이야기 중인 것이 아닌가. 가까이 다가가니 네 명에서 무언가를 나누어 먹고 있었다. 맛있냐고 묻는 내게 엄마는 재빨리 내입도 한 조각을 넣어주었다.



“맛있어 보여서 조금 달라고 했어!”



재밌다는 듯 웃는 엄마의 손에는 어릴 적 사 먹었던 쫀드기가 들려있었다. 씹어보니 역시나 매콤하면서도 쫀득한 느낌이 어릴 적 먹었던 그것과 같았다. 가지고 있던 간식을 다 먹고 나니 아이들은 무심한 듯 손인사를 하며 사라졌다. 말 한마디 안 통하는 곳에서 남의 간식을 얻어먹다니. 두 사람은 어느 나라에 데려다 놓아도 끼니를 거르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는 간식으로 입가심 후 유명하다는 연꽃잎차를 한잔씩 마시며 셔틀을 타고 돌아왔다. 이제 조금 쉬었다가 안방비치를 방문할 예정이었고 쉬는 동안 잠깐 수영을 했다. 엄마의 수영과 이모의 물속 텀블링 묘기까지 볼거리가 풍성했던 탓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두 사람은 물속에 오래 있어 퉁퉁 불어버린 뒤꿈치를 까칠한 돌에 비비는 각질 제거까지 잊지 않았다.


더위가 한풀 꺾이고 오후로 들어서는 시간, 우리는 안방비치로 나가는 막차를 타고 출발했다. 아저씨는 태풍 때문에 아직 바람이 많이 불어 물에 들어갈 수는 없을 것이라며 그냥 올드타운에서 시간을 더 보내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하지만 이미 삐딱하게 시작한 여행을 즐기기로 했으니 안방비치의 모습이 어떻든 즐길 준비가 되어있었다.

안방비치로 가는 길

결심을 한 지 10분도 채 안되었지만 벌써부터 흔들렸다. 오랜만에 방문한 안방비치는 내가 기억하고 있던 모습을 하나도 간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거칠었던 태풍 때문이었으리라. 잔잔한 파도와 투명하게 반짝이던 바다는 온 데 간 데 없고 그 자리에는 모든 것을 삼킬 듯한 파도와 잿빛 흙탕물, 그리고 접근금지 팻말뿐이었다. 아쉬운 대로 바다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 했지만 그마저도 강한 바람 때문에 불가능했다.

바람은 강했지만 행복해보이는 두 사람

그래도 두 사람은 모든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그 강한 바람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으니까. 예쁜 바다를 보여주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우리는 주변 관광에 나섰다. 사실 안방비치는 말 그대로 바다가 메인이기에 바다에 갈 수 없다면 즐길거리가 거의 없었다. 바닷가 근처의 식당들도 모두 문을 닫아버려서 미리 짜왔던 일정을 수정해야 했다. 어쩐지 요 며칠 날씨와 일정이 척척 진행된다 싶었지. 빠르게 검색을 해 괜찮다는 식당을 찾았다. 가는 길이 물에 막혀 몇 번을 돌아가야 했지만 다행히 도착한 식당은 영업 중이었다. 어렵사리 찾은 식당 안에는 우리처럼 안방비치를 기대하며 왔다가 실망한 한국인들이 여러 테이블 있었다.


우리는 붕어찜과 가리비구이, 볶음밥을 주문했다. 아무래도 찜이라 나오는 시간은 좀 걸렸지만 먹어본 생선찜 중에서 가장 부드러웠다고 말할 수 있다.

바나나잎에 잘 싸여 나온 붕어는 순식간에 뼈만을 남긴 채 사라졌고 그것은 볶음밥과 가리비도 마찬가지였다. 볶음밥과 함께 나온 소스가 정말 맛있었는데 사장님께 여쭤보니 직접 만든 소스라고 하셨다. 원한다면 구매도 할 수 있다고 했고 우리는 망설임 없이 1병씩 구매했다.

정말 맛있었던 소스

배불리 먹은 후에 천천히 거리를 돌며 산책을 했다. 발걸음이 닿는 대로 움직이다가 택시를 타고 돌아갈 예정이었는데 걷다 보니 우리의 발길을 붙잡는 가게가 있었다. 간판도 없이 그저 ‘칵테일‘이라고 쓰여있는 곳이었는데 깔끔한 인테리어와 함께 재즈가 흘러나왔다. 칵테일과 재즈. 호이안의 마지막 밤을 위한 훌륭한 이벤트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았고 잠시 후에 키가 2미터는 되어 보이는 백인 할아버지가 발을 끌다시피 하며 직접 메뉴판을 들고 다가왔다. 걸음걸이는 다소 힘들어 보였지만 입가에는 방긋 웃음이 걸려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원하는 메뉴를 묻는 것 대신 어디서 왔냐는 질문을 먼저 해왔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손으로 벽에 붙어있는 문구를 가리킨다. 눈으로 손이 향한 곳을 따라가니 여러 가지 언어로 번역되어 있는 문장들이 있었고 그중 한국어도 있었다.

‘낯선 사람으로 오다 - 친구로 떠나다’


이 가게에 들어온 모든 낯선 이 가 나갈 때는 친구로 나갔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들어오는 모든 이에게 직접 메뉴판을 건넸고 환하게 웃으며 슬로건을 보여주었다.


“hahaha my friend!”


나는 호탕하게 웃으며 포옹으로 인사했다. 그도 마찬가지로 웃으며 인사했고 여러 가지 술 중에 각자 원하는 것을 골라 주문했다. 두 사람은 신중하게 메뉴들을 읽어보며 골랐고 나는 별생각 없이 오늘의 칵테일을 주문했고 오늘 것은 ‘블러드메리‘였다. 잠시 후 각자의 술이 나왔는데 엄마는 예쁜 칵테일 잔에 나왔지만 이모는 아주 큰 벤티 사이즈의 유리잔에 음료가 나왔다. 안에는 민트처럼 보이는 식물이 가득 들어있었다. 처음 보는 비주얼의 칵테일에 놀라고 있을 때 나의 블러드메리가 나왔다. 이름처럼 불그스름하며 입구에는 소금과 통후추로 보이는 것이 잔뜩 토핑 되어 있는 음료였고 맛을 상상할 수 없는 비주얼이었다. 엄마는 역시 상큼한 과일향이 나는 술이었고 이모의 것도 것 보기와는 다르게 민트향이 묻어나는 향긋한 술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의 것은 아니었다.

생일주, 혹은 벌주라고 하는 유쾌하지 않은 문화가 한국에 존재한다. 어디로부터 파생된 지는 모르겠으나 생일자 혹은 잔뜩 무르익은 술자리에서 술게임을 하다 걸렸을 때 마시게 되는 술이다. 제조법 또한 간단하다. 눈에 보이는 가장 큰 잔에 술을 종류별로 넣고 테이블 위의 먹을 수 있는 모든 음식을 때려 넣는 것. 때때로 해장을 위한 국물이 들어가기도 하고 안주용 과자나 후추, 조금의 건더기가 들어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나의 블러드메리 맛을 설명하라고 한다면 딱 그 맛이다. 마치 오늘은 나의 생일이고 안방비치의 직원들이 나를 위한 생일주를 제조해 준 느낌이었다. 친구로 떠난다더니 아직 2개월이나 남은 내 생일을 나의 새 친구들이 미리 축하해 주는 것에 틀림이 없었다. 재료는 아마 맛으로 추측해 보건대 위스키 베이스에 스리라차 소스 가득, 소금과 후추, 그리고 올리브와 올리브국물. 이런 진귀한 맛을 혼자만 볼 수는 없으니 엄마와 이모에게도 권했고 두 사람은 베트남에서 두리안을 먹은 이후를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그때 사장님이 다가오셨고 마치 나를 놀리듯 맛이 어떠냐고 물었다. 온갖 험한 말을 가려내고 간신히 내 스타일은 아니라고 하자 그는 진심으로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칵테일이며 매일 아침 일어나 이것을 마신다고 했다. 진심인가 싶어 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지만 한치의 거짓도 보이지 않았다. 맑은 눈의 광인.. 이 이런 느낌일까. 나는 절대 마시지 못할 것 같다며 다른 술을 추천받았고 이내 내 마음에 쏙 드는 달달한 칵테일 한 잔이 나왔다. 우리는 웃고 떠들고 이야기를 나눴다. 주인장 할아버지는 우리 테이블에 관심이 많은지 자주 와서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그는 우리에게 한국 어디에 살고 있냐고 물었다고 우리는 그에게 한국에 와본 적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놀랍게도 평택에 가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또 우리에게 몇 살이냐고 물었고 우리는 몇 살 같아 보이냐고 되물었다. 내게는 22살 같다고 했다. 만 나이로 계산해도 4살이나 어리게 말해주었으니 통과. 엄마와 이모는 40대 초반일 거라고 예상했다. 사는 곳도 다르고 사용하는 언어도, 눈색깔도, 피부색도 다르지만 함께 섞여, 흘러가는 지금 이 시간을 추억이라는 예쁜 기억으로 바꾸어 나갔다. 마치 칵테일처럼.

이 장면을 애써 예쁘게 기억할 필요는 없다. 추억이라는 폴더는 자동보정 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이 순간을 100% 즐기기만 하면 된다. 취기가 슬슬 올라왔고 이모는 주문한 술이 너무 약한 것 같다며 샷을 한잔 더 마셨다. 샷을 털어 넣었고 환하게 웃는 이모의 얼굴에 우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맛없는 술, 호탕하게 웃는 할아버지, 샷을 털어 넣는 이모와 웃는 엄마.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순간이었다.

그는 끝내 손가락 하트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화려하진 않지만 은은한 조명들이 우리를 반겼다. 오늘 참 많은 일정을 소화했기에 우리는 모두 지쳐있었고 오늘 하루를 곱씹으며 누웠다. 엄마와 이모는 하루 일정이 끝나면 내가 단톡방(우리 가족과 이모네 가족이 함께 있는)에 공유한 그날의 사진들을 보며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잠이 든다. 오늘도 역시 두 사람의 이야기 소리를 자장가 삼아 눈을 감았다. 맛있는 술은 좋은 기억이 되고 맛없는 술은 좋은 추억이 되었다. 두 가지 모두 좋은 일이었다. 여행에서 나쁜 일은 생기지 않는다. 잊거나 추억하거나. 우리는 각자만의 방법으로 여행을 기억한다. 오늘이 지나면 어제가 될 순간들이 좋은 추억으로 잔뜩 쌓인 채 끝나간다.

_그날 밤


“엄마랑 이모, 근데 왜 아까 10살이나 어리게 봐줬는데 별로 안 좋아했어? “


”뭐??? 50 초반으로 본거 아니었어? “


“40대 초반 같다고 했는걸. “


”우리는 50대라고 들었지 뭐야! 그 양반 보는 눈이 있었네 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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