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의 소원을 품은 수백 개의 불빛
느지막이 일어나려고 했지만 오늘도 역시나 이른 아침부터 눈이 떠졌다. 장소만 바뀌었을 뿐 엄마와 이모의 고정석은 변함없이 창가 앞이었다. 다낭에 비해 이곳은 그저 시골 풍경과 나무들 뿐인데도 둘은 한참을 재미있게 이야기를 한다. 내가 일어나자 두 사람은 얼른 조식을 먹으러 가자며 보챈다.
계단을 내려가며 펼쳐진 풍경에 다시 한번 놀라며 식당으로 향했다. 우리는 호수를 바라보며 식사를 하기 위해 야외테라스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조식은 뷔페식으로 제공되었고 종류도 다양했다. 여러 번 그릇을 가져다 먹는 두 사람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진다. 나 또한 여러 접시를 비우고 후식까지 먹고 나니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배가 불렀고 더 이상은 음식이 들어갈 수 없겠다 싶을 때쯤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화를 시킬 겸 숙소를 구경하던 중 사촌형에게 페이스톡이 왔다. 슬슬 복구가 진행되고 있나 보다. 이모는 신이 나서 카메라를 통해 숙소 구석구석을 보여주었고 형은 리엑션 좋은 예능인처럼 훌륭하게 반응해 주었다. 숙소 간접 투어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와 누웠다. 원래 오전 일정은 코코넛배를 타려고 했으나 둘 다 무서워해서 취소하고 자유롭게 보내기로 했다. 엄마는 미뤄두었던 낮잠을 한숨 자기로 했고 나와 이모는 자전거로 숙소 근처를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호텔 측에서 자전거를 무료로 대여해 주기에 2개를 받아 출발했다. 호이안은 같은 베트남이지만 다낭과는 너무나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다낭이 시의 느낌이라면 호이안은 읍, 면, 리의 느낌이다. 따스한 햇살과 바람을 맞으며 시골길을 달리니 기분이 좋았다. 이모도 어릴 적 살던 곳과 비슷하다며 좋아했다. 나무에서 딴 열매를 시장에 팔기 위해 정리하는 사람, 야자나무 잎을 말려 지붕을 만드는 사람, 소를 끌고 가는 사람, 농사를 짓는 사람 등. 우리는 자전거를 타며 제각기 할 일에 바쁜 사람들 속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갔다. 그들은 우리가 지나가면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우리의 손인사를 받고 나서야 다시 할 일에 열중했다. 논길 옆을 한참 달렸을 때 앞에서 희한하게 생긴 열매를 따고 있는 노부부를 만났다. 처음 보는 열매에 우리는 자전거를 멈춰 세웠고 처음 보는 사람들에 노부부는 손을 멈췄다. 어색한 침묵 뒤 거의 동시에 서로 웃어 보였고 손인사를 나눴다. 이모는 과일을 가리키고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이모의 바디랭귀지를 눈치껏 알아들은 그들은 웃으며 오물오물 씹는 제스처를 취했고 엄지를 들어 올렸다. 이모는 한참을 바라보다가 아쉬운 표정으로 자전거를 굴렸다.
“하나 먹어보라는 눈치는 없으신가 보네…”
페달을 한참을 밟으니 이번에는 주거지역이 나왔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도 보였고 식사를 하거나 어딘가를 향해 걷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우리도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구경하던 중이었다. 오토바이들에 섞여 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한 가정집에서 꼬마와 놀고 있던 여자가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뭐라고 한 거지?”
이모가 물었지만 답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익숙하게 들어온 영어였던 것 같았는데…
“Where are you from?”
“아! 맞네! 그거였네!”
내 추측이 맞다는 듯 이모의 탄식이 나온다. 그걸 대답 못해줬다며 굉장히 아쉬워했다. 낯선 이에게 건넨 용기 있는 한마디에 대답해주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쉬웠던 듯 이모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한 시간 정도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니 이모도 지쳤는지 엄마 옆에서 좀 자야겠다고 했고 그동안 나는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기로 했다.
한참을 혼자 수영하고 있었는데 엄마와 이모가 내려왔다. 은평구물개와 강남구물개. 두 물개들은 오랜만의 수영에 신이 났는지 한참이 지나도 물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엄마는 예전에 배웠던 수영실력을 뽐내며 물속을 자유롭게 움직였고 이에 질세라 이모는 물속에서 앞 구르기를 뽐냈다. 두 사람은 손발이 쪼글쪼글해질 때까지 수영을 즐겼고 수영장 계단에 걸터앉아 까칠한 돌로 뒤꿈치까지 정리하고 나서야 일어났다. 뽀송해진 뒤꿈치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숙소로 돌아왔고 어제 야시장에서 사 온 원피스로 갈아입은 뒤 셔틀버스에 올랐다.
뜨거운 햇살이 살짝 기울고 따사롭게 내리쬘 때쯤 우리는 호이안 시내에 도착했다. 우리는 자전거 타기와 수영으로 허기가 졌기에 식사를 먼저 하기로 했다. 미리 알아두었던 식당으로 향했다. 한국인들에게 유명한 식당답게 한글로 가게 이름이 쓰여있어 찾기 쉬웠다.
우리는 각자 먹고 싶은 음식들을 주문했고 테이블은 금세 가득 차버렸다. 반쎄오와 분짜, 고기류, 그리고 뚝배기에 제공되는 쌀국수까지. 깊고 진한 육수의 쌀국수가 뚝배기에 담겨 나오는데 뜨끈한 국물을 좋아하는 엄마들의 취향저격 메뉴였다. 다른 메뉴들도 굉장히 맛있어서 꽤 많은 양을 주문했지만 남김없이 다 먹을 수 있었다. 배불리 먹고 나서야 우리는 가게를 나왔다.
소원배는 해가 쨍할 때보다는 노을이 지고 나서 타는 것이 더 아름답기에 그때까지 구석구석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진을 잔뜩 찍고 구경하다 보니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갔다.
우리는 서둘러 투본강으로 향했다. 투본강으로 향하는 초입부터 소원배를 위한 호객행위가 시작되었다. 예전에는 이 사람들과의 흥정을 통해 티켓을 구매했지만 최근 정찰제로 바뀌었다고 한다. 사기꾼들을 헤집고 도착한 강둑에는 역시 표를 살 수 있는 창구가 마련되어 있었고 창구가 나오자마자 사기꾼들은 연기처럼 흩어져 다른 희생자를 찾아 떠났다.
인원수에 따라 가격이 정해져 있어 값을 지불하고(3명 15만 동, 약 7500원) 줄을 서서 기다렸다. 어둑어둑해지는 하늘과 강물 위에 수십대의 배가 각자의 등불을 켠 채로 떠있었다. 줄은 금세 줄어들었고 우리는 안내에 따라 구명조끼를 입고 소원배에 올라탔다. 소원 등은 역시나 흥정을 통해 구입했고 3개에 25000동(1800원 정도)에 구매했다. 소원배는 사공아저씨의 손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우리는 금세 기다리는 동안 보았던 풍경 속의 일부가 되었다. 배가 어느 정도 움직이자 사공아저씨가 초에 불을 붙이라고 알려주셨다.
우리는 각자의 소원을 담은 소원배를 정성스럽게 물 위에 띄웠다. 물에 놓기 전 눈을 감고 속으로 소원을 비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미 수백 개의 등이 수백 개의 소원을 싣고 물 위를 떠가고 있었다. 우리의 소원도 물길을 따라 이동하며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사라졌다. 소원배는 유유히 소원들을 피해 헤엄치며 강을 크게 한 바퀴 돌았다. 가는 길에 한국에서 온 또 다른 가족들과 나란히 가게 되었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3대가 함께 여행을 온 것이었는데 아직 아이들이 어렸다. 그 아이들의 엄마는 아이들을 이미 다 키운 뒤에 여행을 온 우리 엄마들을 부러워했다. 내가 보기에 나는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은 것 같은데 남들이 보기에는 한참 전에 이미 어른이 되었나 보다. 아이가 크는 동안 엄마들은 급히 어른이 된다. 그래서 아이가 어른이 되는 만큼 딱 그만큼씩 엄마들은 다시 아이로 돌아가나 보다. 더 빨리 어른이 될 걸 그랬다. 세 아이의 엄마라는 부담을 더 빨리 덜어줄 걸 그랬나 보다.
출렁이던 배 위에서 내려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채 천천히 걸었다. 멋진 그림을 망설임 없이 즉석에서 그려내는 화가 아저씨도 있었고 나무를 이용해 만든 공예품도 구경했다. 야시장에도 점점 활기가 차올랐고 꺼져있던 등에도 하나 둘 불이 들어왔다. 화려한 등불 앞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사람들은 줄을 섰고 우리도 따라서 줄을 섰다. 여기서 사진을 찍으려면 돈을 내야 한다. 가격은 10000동으로 한화로 약 500원 정도. 저렴한 가격이고 일단 돈을 내면 100장이든 200장이든 상관없이 찍을 수 있기에 두 사람 어치의 돈을 지불했다. 이모는 또다시 잔뜩 어색해하며 여러 가지 포즈를 취했고 어색함을 풀기 위해 엄마를 투입했다. 그래도 혼자보다는 나았는지 한결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사진을 잔뜩 찍고(정말로 100장 정도 찍은 것 같았다) 천천히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오늘이 지나면 베트남의 밤이 2번 남게 된다. 두 사람도 아쉽다며 탄성을 내뱉었다. 다음 나니투어는 어디로 가냐며 미리 대기표를 사겠다는 두 사람. 덕분에 즐겁게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오늘 하루의 마무리는 입욕으로 결정되었다. 미리 챙겨 왔던 머드팩과 입욕제로 엄마와 이모의 피로를 풀어주었다. 두 사람 얼굴에 팩을 발라주고 욕조에 입욕제까지 풀어주고 나왔다. 입욕시간 내내 욕실에서는 두 사람의 이야기소리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나 혼자 떠나왔다면 절대 느끼지 못했을 감정들이 피어났다. 그만큼 신경 쓸 것도, 걱정도 많았지만 함께 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시 선택할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나는 같은 메시지를 보냈을 것이다. 덕분에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잔뜩 얻었으니 보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나에게 굉장히 큰 의미로 남은 이 여행이 두 사람에게도 큰 추억으로 남기를. 앞으로의 길에서 힘이 들 때 이따금씩 꺼내볼 만한 기억 중 하나로 자리 잡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