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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삶의 UP & DOWN

일과 예술

 

  인간은 끝없이 묻고 이야기하며 산다. 행복에 대하여, 정의에 대하여, 사랑에 대하여, 인간에 대하여, 신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성공, 가치, 의미, 교육, 직업에 대하여 끝없이 묻고 이야기하며 산다. 인생이 소중하니까. 한 번뿐인 인생 정말 잘 살고 싶으니까. 


  당신은 어떤가? 당신은 뭘 물으며 사는가? 당신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가? 일하며 행복감에 젖는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통해 존재와 삶이 UP 되고 있는가?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그러지 못한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계약 노동자나 고용자에게 고용되어 일하니까. 일의 주체가 아니라 일에 종속되어 살아가니까. 철저하게 분업화된 일이나 전문적인 일을 하니까. 더욱이 현대사회는 인력 동원체제이니까. 사람을 위해 일이 동원되는 게 아니라 일을 위해 사람이 동원되는 체제, 일을 통해 인간과 삶을 UP 시키는 게 아니라 일을 UP 시키기 위해 인간을 동원하는 매우 기이한 체제이니까. 


  정말 그렇다. 이런 기이한 체제 속에서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 일하며 행복감에 젖는다는 것, 인간과 삶을 UP 시키는 일을 한다는 것, 그리 쉽지 않다. 자기 인생 전체를 걸고 싸워도 쉽지 않다. 하지만 길이 없는 건 아니다. 결코 쉬운 길은 아니지만 길은 있다. 내 작은 지혜로 찾은 길은 이것이다.  

    

  첫째, 인간과 일의 뒤집힌 위상을 바로 잡아라. ‘사람은 일 이상의 존재’라는 원칙을 분명히 하라. 

  둘째, 일과 인간 간의 소외와 분열을 통합시키라. 일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거리를 최대한 좁히라. 

  셋째, 그러기 위해 나는 누구인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묻고 따져보라. 

  넷째, 나에게 맞는 일,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어떤 일인지를 온몸으로 부딪혀가며 찾으라.      


  매우 원론적인 이야기다. 그러나 이것이 가장 유효하고 현실적인 해법이다. 개중에는 무조건 취업부터 하고 보자고 덤비는 사람, 무슨 일이 됐든 돈만 벌 수 있다면 닥치고 GO 하는 것이 현실에서 강자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일과 얽힌 문제의 실타래를 풀 수 없다. 비록 원론적인 이야기 같고, 당장 일해야 먹고사는 장삼이사들이 그런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사치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것이 인간과 삶을 DOWN 시키는 일을 하며 사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길, 소외된 노동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해 나누고 싶은 근사한 이야기가 있다. 장자 양생주(養生主) 편에 나오는 소 잡는 포정(庖丁) 이야기이다. 짧게 정리하면 이렇다.    

  

포정이 한 번은 문혜군(文惠君)을 위해 소를 잡았다. 포정이 손에 칼을 들고 발과 어깨를 움직일 때마다 살점이 스르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고 문혜군이 “소 잡는 기술이 참 탁월하구나.”라고 감탄하자 포정이 칼을 내려놓고 대답하기를, “제가 좋아하는 것은 도(道)입니다. 기술에서 더 나아간 것이지요.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3년이 지나고부터는 소가 한 덩어리가 아니라 뼈와 살로 분리돼 보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눈으로 소를 보지 않고 마음으로만 봅니다. 소의 육체 조직에 부여된 하늘의 섭리를 좇아 잘라나갑니다. 뼈와 살 사이에 연결된 빈틈을 따라 잘라나가면 칼이 뼈와 부딪칠 일이 없습지요. 그러니 19년 동안 이 칼 하나로 소 몇천 마리를 잡았어도 방금 숫돌에 갈아낸 것처럼 칼날이 날카롭습니다.……”라고 소 잡는 일을 소상히 설명했다. 포정의 이야기를 다 들은 문혜군은 흐뭇한 마음으로 “참으로 훌륭하구나. 오늘 내가 포정의 말을 듣고 양생의 도(삶을 제대로 사는 길)를 얻었노라.”라고 말했다.      


  포정이 소를 잡는 걸 보면 어떤 저항이나 막힘이나 억지가 없다. 소의 모든 것을 꿰뚫어 알고, 소의 성질에 맞는 칼질을 하기 때문에 모든 칼질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예리하다. 한 마디로 소와 소 잡는 일, 소 잡는 사람이 혼연일체다. 장자는 바로 이 경지를 일컬어 삶의 도라고 말한다. 


  나는 탁월한 연주자들의 연주를 들을 때 그런 경지를 느낀다. 피아노 연주를 듣거나 첼로 연주를 듣거나 오케스트라 단원이 혼연일체가 되어 연주하는 교향곡을 들을 때, 즉 연주자와 음악과 악기가 혼연일체임을 볼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황홀함을 느낀다. 특히 최근에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최연소로 우승해 화제가 된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초절정 기교 연습곡(리스트 작곡) 연주는 가히 압권이었다. 연주 영상을 보면서도 ‘어떻게 저런 연주를 할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압권이었다.   

   

  정말 그렇다. 일하는 사람과 일이 혼연일체인 것보다 더 깊은 감동과 충만감을 주는 것은 없다. 흔히 말하는 천국도 어쩌면 바로 이런 곳, 모든 사람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그 일을 통해 모두의 삶이 풍요로워지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없는 세상이 아니라 모두가 자기 능력을 맘껏 발휘하며 일하는 세상. 서로가 서로의 일을 기뻐하고 환호하는 세상. 


  삶의 주인공 또한 돈이나 권력을 쥐고 흔드는 사람이 아니라 포정이 소를 잡고 임윤찬이 피아노 연주를 하듯 일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하고 싶은 일, 자기와 궁합이 잘 맞는 일, 그리고 그 일을 통해 인간과 삶을 UP 시키는 사람이 진짜 삶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삶의 주인공은 아무렇게나 되지 않는다. 무조건 취업부터 하고 보자며 덤벼서 되지 않는다. 무슨 일이 됐든 돈만 벌 수 있다면 닥치고 GO 해서 되지 않는다. 무턱대고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되지 않는다. 돈이 많다고 해서 되지 않는다. 권력을 휘두른다고 해서 되지 않는다. 나를 알고, 세상을 알고, 일의 요령을 알아야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인간과 일의 뒤집힌 위상을 바로 잡고, 일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거리를 좁혀 나에게 맞는 일,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진짜 삶의 주인공으로 살고 싶다면 반드시 나는 누구인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따져 물어야 한다. 나에게 맞는 일,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어떤 일인지를 찾아 묻고, 여기저기 문을 두드려야 한다. 이 옷이 내 몸에 잘 맞는지, 이 사람과 소중한 삶을 함께 할 수 있겠는지 섬세하게 살피며 선택하듯 자기에게 맞는 일을 신중하고 섬세하게 살피며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말이 쉽지 실제로 이렇게 하기란 매우 어렵다. 나를 알고, 세상을 알고, 나와 궁합이 맞는 일이 어떤 일인지를 감식할 수 있는 심미안이 있어야 가능하다. 우리가 쉼 없이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삶에 은퇴는 없으나 일에서 물러나는 은퇴는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은퇴 문제의 핵심 본질은 단지 일없음이 아니라 일없이 살아야 하는 시간이다. 일의 위상이 지나치게 높아져서 일없이 사는 시간이 문제적 상황이 된 것이다. 일은 인간과 삶을 UP 시키기도 하고 DOWN 시키기도 한다. 일을 통해 인간과 삶을 UP 시키는 진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나는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나에게 맞을 뿐만 아니라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찾아야 한다. 이것이 공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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