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남의일만할거야?
나는 누구나 알 만한 대기업에서 8년의 시간을 보냈다.
회사의 체계는 완벽했고 시스템은 매끄러웠다.
보상도 만족스러웠고 주변의 부러운 시선도 받았다.
하지만 나에게 회사 생활은 기대감보다는 지루함의 연속이었고,
성과가 나는 상황에서도 뭘로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이 있었다.
내가 맡은 일은 늘 분업화 내지는 세분화되어 있었고,
그 톱니바퀴가 무엇을 돌리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숲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원천 차단이었다.
회사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흥미가 있었던 나에게
회사의 전략, 매출 구조, 리스크, 비용과 같이 업무 자체를 제외한
정작 재미 있는 모든 것들은 '다른 부서 일'일 뿐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 쌓인 고민이 응축되어 가던 어느 날,
남들 다 하는 이직이 아니라 창업을 위한 퇴사라는 결심으로 이어졌다.
진짜 사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직접 느끼고 싶었다.
때마침 극단적으로 작은 소기업으로 옮기는 행운을 얻었다.
직원이 세 명뿐인, 그야말로 날것의 현장이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사업의 피와 살이라는 것을 보았다.
고객이 끊기면 바로 매출이 떨어졌고, 수익률이 떨어지면 사장님은 밤을 새웠다.
10평도 안되는 사업장에서 자연스럽게 사장의 일들은 나에게 공유될 수밖에 없었다.
종업원 급여, 인센티브 산정, 외주 원가율, 세금 처리, 복리후생비까지,
그동안 대기업에선 "누군가 알아서 하던 일들"이 전부 내 일처럼 느껴졌다.
어느 날 사장님이 말했다.
"다음 달 거래처에 나갈 현금이 부족해. 어떡하지?"
대기업에서 8년 동안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곳에서는 월급이 '나오는 것'이었지,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ㅇ 월급은 싸워서 벌어오는 것이었고, 매달 불확실한 것이었다.
그건 교육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배운 게 아니라 부딪혀서 익힌 것이었다.
그곳에서의 10개월 남짓은 돌이켜보니 본 무대를 위한 리허설이었다.
리허설은 원래 대본대로 안 간다. 그래서 더 많이 배운다.
겪어 보니 사업은 천재가 하는 게 아니었다.
비즈니스 전체를 통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하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동일 업종에서의 창업이라면, 이미 시장의 구조와 밸류체인이 머릿속에 들어와 있다.
아는 맛이고, 해본 초식이라 리스크는 줄고 판단은 빨라진다.
만약 완전히 다른 업종이었다면 그 정도 기간 가지고는 택도 없었을 것이다.
대기업, 공기업, 공무원 출신들이 창업하면 유독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분명하다.
겉보기엔 안정적이지만 리스크에 직접 노출되지 않는 환경 때문이다.
즉, 사업 감각의 근육이 퇴화되고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효율은 잘 안다. 하지만 변수를 모른다.
보고서로는 해결되지 않는 일, 관계와 타이밍이 좌우하는 시장의 논리를 겪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오랜 세월 안정적 직장인을 했던 사람이 갑자기 자영업을 하면 망할 확률이 높다.
무대에 오르긴 했지만 리허설 없이 올라온 배우이기 때문이다.
사업은 교과서가 아니라 현장이다.
현장에서 몸으로 배운 사람만이 예상 밖을 견딘다. 그게 사업의 본질이다.
회사에서 직장인은 급여로 평가받고 임원은 경영 성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밖에서 보면 둘 다 일을 연습하는 월급쟁이일 뿐이다.
대부분의 직장인은 리허설 중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그 시간을 그냥 때운다.
남에게 돈 벌어주는 회사에서 버티는 동안 정작 자신의 감각은 퇴화한다.
관찰하고 계산하고 흉내 내야 할 시간을 그냥 흘려보낸다.
회사라는 무대는 무료로 제공된 리허설 무대다.
그 무대에서 진심으로 연습한 사람만이 언젠가 본 무대에서 살아남는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무대를 리허설이 아니라 본 공연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열심히 일하고 승진하면 그게 성공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건 남의 무대에서 조연으로 잘 연기한 것일 뿐이다.
"인생은 두 번째 기회가 없는 연극이다."
출근길은 매일 똑같다고 느껴지지만 사실은 매일이 다른 무대다.
오늘도 우리 중 누군가는 자신만의 사업을 위해 리허설 중이고,
누군가는 이미 본 무대 위에서 연기 중일 것이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리허설인 줄도 모르고 평생을 조연으로 살아간다.
직장은 남의 꿈을 실현시키는 곳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나 때가 되면 나오고 싶지 않아도 직장을 나와야 한다.
그래서 직장이란 내 사업 감각을 훈련하는 리허설의 무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