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상사는 회사가 주는 가장 큰 축복이다

평생 남의 일만 할거야?

by 손동진

늘 책상에 기대 앉아 담배만 피우던 그 사람.

하지만 위기 상황이 터지면 아무 말 없이 정확히 한 수를 두는 사람.

사실 그게 진짜 고수다. 게으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미 다 보고 있는 사람.

내 커리어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대기업에서 이직해 처음으로 소기업에 갔을 때, 나는 상사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상사가 사장이었는데, 그는 출근을 거의 안 했다.

회의도 없고, 지시도 없었다.

처음엔 불안했다. 이래도 회사가 돌아가나 싶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일을 찾아다녔다.

고객 전화를 내가 먼저 받았고, 기획서도 주제를 정해서 만들었다.

그때는 그저 불안해서 움직인 것뿐이었는데,

돌이켜보면 그 시절이 내가 가장 폭발적으로 성장한 시간이었다.


대기업에서 게으른 상사를 만나면 그냥 답답하다.

시스템이 회사를 돌리니까 그 사람이 게으르든 말든 일은 굴러간다.

결국 당신은 매뉴얼 안에서만 움직이게 된다.

톱니바퀴처럼 정해진 궤도를 따라 돌 뿐이다.

그런데 작은 회사에서는 다르다.

사장이 손을 놓는 순간, 그 자리를 직원이 메워야 한다.

그때부터 당신은 부하직원이 아니라 대리 사장이 된다.

결정하고, 책임지고, 결과를 본다. 이게 바로 사업머리의 시작이다.


이것이 중소기업에서 상사의 게으름이 더 큰 의미를 갖는 이유이다.

대기업은 당신이 없어도 회사가 돌아가지만,

중소기업은 당신이 없으면 회사가 멈춘다.

그 차이가 만들어내는 긴장감은 상상 이상이다.

대기업에서는 내가 맡은 업무의 한계가 보인다.

기획서를 쓰면 누군가 검토하고, 승인하고, 실행팀에 넘긴다.

내 역할은 거기까지다.

하지만 중소기업에서는 내가 쓴 기획서를 내가 실행하고,

내가 고객에게 설명하고, 내가 수금까지 책임진다.

처음부터 끝까지가 다 내 손을 거친다.


그러니까 중소기업에서 상사가 게으르다는 건,

단순히 일을 안 한다는 게 아니다.

그건 당신에게 회사 전체를 보는 눈을 키울 기회를 준다는 뜻이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회사의 손익계산서를 들여다봤다.

우리 제품의 마진이 얼마인지, 어느 고객이 진짜 돈이 되는 고객인지,

어떤 프로젝트는 포기해야 하는지를 터득했다.

사장이 매일 출근해서 지시했다면 나는 평생 몰랐을 것들이다.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부재는 나에게 경영자가 되기 위한 밑거름이었다.


어쩌면 더 중요한 건, 실패할 권리를 얻었다는 것이다.

대기업에서는 실패하면 보고서가 올라가고, 회의가 열리고, 책임 소재를 따진다.

그래서 모두가 안전한 선택만 하게 된다.

하지만 중소기업에서 사장이 없으면, 당신은 작은 실패를 반복하며 배운다.

고객에게 잘못된 답변을 했다가 직접 사과하고,

납기를 착각해서 밤을 새우고, 거래처와 가격 협상에서 밀리는 경험을 한다.

심지어 어쩔 때는 사장이 내가 저지른 실수를 모르고 넘어갈 때도 있다.

그 작은 실패들이 쌓여서 당신을 단단하게 만든다.

누군가 당신을 구해주지 않기 때문에, 당신은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운다.


세월이 흘러 나는 경영자가 되었고 새삼 다시 깨닫는다.

진짜 게으른 상사는 일을 미루는 사람이고,

전략적으로 게으른 상사는 일을 맡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 사장은 출근을 안 했지만, 어떤 식으로든 회사의 맥박을 짚고 있었다.

어쩌면 일을 맡긴 다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게으른 상사 밑에서 일할 땐 불불평하지 말자.

그 빈자리를 어떻게 메우느냐가 당신의 커리어를 결정짓는다.

게으른 상사는 회사를 버린 게 아니라,

당신이 언젠가 사장으로 성장할 기회를 던져준 고마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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