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남의일만 할거야?
"우린 혼자 살아남을 수 없어. 서로 연결돼 있어."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쿠퍼가 우주선 안에서 이런 말을 한다.
그 장면을 보면 예전에 내가 혼자 일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기획도, 영업도 혼자 하고, 상품도 만들고, 비용도 직접 검토했다.
그런데 그렇게 혼자 일하는데도 나는 큰 조직에서 일 할때 보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과 연결돼 있었다.
고객의 목소리가 직접 내 귀에 들렸고, 관리팀의 한숨이 내 일이 되었고,
협력사의 고민이 내 숙제가 되었다.
대기업에선 내가 만든 문서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개의치 않아도 되었다.
내 일은 기획서를 완성하는 것이었고, 그 이후는 다른 누군가의 몫이었다.
경계가 분명했고, 책임도 명확했다. 어쩌면 편했다.
반면, 작은 기업에서는 첫 날부터 모든 게 달랐다.
월요일엔 기획 회의, 화요일엔 고객 미팅, 수요일엔 현장 출장,
목요일엔 협력사 대응, 금요일엔 재무 검토.
역할이 아니라 흐름 전체가 내 일이 되어버렸다.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이게 내가 할 일인가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
사일로는 책임을 나누는 구조에서 생긴다는 것을 말이다.
작은 조직에서는 사일로가 생기지 않는다. 아니, 생기고 싶어도 생길 수가 없다.
벽을 세울 사람도, 벽 뒤에 숨을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대기업이 "애자일 조직"을 외치며 벽을 허무는 데 애를 쓸 때,
작은 회사는 그냥 애초에 벽이 없다. 이 역설이, 모든 걸 설명한다.
혼자 일하는 환경에서는 책임이 나뉠 틈이 없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일의 앞단부터 뒷단까지 모두 보이기 시작한다.
몸은 피곤한데, 시야는 넓어진다. 이게 중소기업의 마법이었다.
대기업에서는 일의 실패 지점을 찾기 어렵다.
부서가 많고, 책임이 분산돼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기획이 문제였다고 하고, 누군가는 실행이 부족했다고 한다.
결국 원인은 흐릿해지고, 개선은 더디다.
하지만 작은 기업에서는 정반대다.
고객이 불만을 이야기하면 그게 바로 기획의 문제이자 마케팅의 문제이자
재무의 문제이자 대표의 문제이자 결국 '나의 문제'가 된다.
이게 괴롭다. 정말로. 도망칠 곳이 없으니까.
그런데 이게 성장 속도를 비약적으로 끌어올린다.
사일로가 없다는 건 다른 부서의 일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는 뜻이다.
마케팅 담당자가 왜 저런 메시지를 쓰는지, 재무팀이 왜 저 숫자에 민감한지,
개발팀이 왜 일정을 지키기 어려운지. 그 모든 맥락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그 이해가 나중에 가서는 사업머리로 전환되는 결정적 자산이 된다.
대기업에서는 일을 '조각'으로 이해한다.
중소기업에서는 일을 '전체'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 전체 감각은 책으로도, 세미나로도 배울 수 없다.
오직, 사일로가 없는 환경에서 몸으로 부딪쳐야만 얻어진다.
나는 그 경험으로 일머리에서 사업머리로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었다.
내 기획서가 어떻게 돈이 되는지, 내가 만난 고객이 어떻게 매출로 연결되는지,
제안한 아이디어가 왜 실행되지 못하는지. 그 모든 연결고리가 선명해진다.
힘들었고, 고단했고, 여러 번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전부가 성장의 지름길이었다.
10년 걸릴 일을 1~2년에 다 겪었다고 생각한다.
좋든 나쁘든. 그리고 깨달았다. 벽이 없기에, 결국 벽을 넘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 경험은, 어떤 조직에 가더라도 나를 다르게 만드는 무기가 된다.
사일로 너머를 보는 눈, 전체를 읽는 감각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