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남의 일만 할거야?
경력기술서는 원래 누군가에게 제출하기 위해 쓰는 문서라고들 생각한다.
면접을 앞두고, 이직을 준비할 때, 혹은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될 때
급하게 손을 대는 서류라는 인식이 많다.
하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이 문서를 그런 용도로 보지 않았다.
경력기술서는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점검하는 일기장에 가깝고,
매일 혹은 매달 한 번씩 나의 자립도를 확인하는 가장 조용한 수련에 가깝다.
사람은 스스로를 잘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잘 모른다.
바쁘게 살아가는 사이에 내가 어떤 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어떤 상황에서 성장하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어떤 선택을 반복하는지 흐릿해지기 쉽다.
기록은 그 흐림을 맑게 만든다.
내가 어떤 프로젝트를 맡았고, 어떤 난관을 넘었고, 무엇을 배웠는지,
그 경험이 나를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써 내려가다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조용히 드러난다.
그리고 그 흐름은 결국 하나의 방향으로 이어진다.
그것을 나는 ‘창업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창업은 아이템으로 시작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람의 세계관에서 시작된다.
어떤 문제를 보았고, 그 문제를 왜 나만의 방식으로 해결하고 싶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경험들이 나를 밀어왔는지에 대한 서사가 있어야만 한다.
이 세계관이 단단한 사람은 어떤 아이템을 잡아도 금세 생명력을 부여한다.
반대로 세계관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번쩍이는 아이템을 가져도 오래 버티지 못한다.
결국 사업은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고,
문제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힘은 오직 자신의 경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이 결들이 겹겹이 쌓여 하나의 문법을 만든다.
내가 어떤 문제에 지속적으로 개입해왔는지, 무엇을 해결할 때 가장 강해지는지,
어떤 상황에서는 반드시 실수가 나오는지, 어떤 선택을 하면 결과가 좋아지는지,
그 모든 패턴이 기록 위에 떠오른다.
이 패턴은 결국 ‘나만의 대체 불가능성’을 만들어낸다.
사람들이 "그 과업에 왜 꼭 당신이어야 하느냐?" 묻는다면,
그때 대부분은 이야기할 언어가 부족하다.
경험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정리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력기술서를 오랫동안 기록한 사람은 자신을 설명할 때 빈틈이 없다.
내가 어떤 환경에서 근육을 키웠고, 어떤 문제의 구조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는지,
어떤 고객을 오래 마주해왔는지 말할 수 있다.
이 말들은 꾸며낸 문장이 아니라, 삶에서 길어 올린 문장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뢰하게 되고, 그 신뢰는 곧 팀 빌딩과 투자 유치의 원동력이 된다.
창업자에게는 이 신뢰를 만드는 세계관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업은 결국 결정의 연속이다.
불확실한 정보 속에서 매일 수십 번 판단해야 한다.
그 순간을 지켜주는 것은 화려한 영감이 아니다. 내가 살아온 경험의 패턴이다.
어떤 선택은 나에게 거듭 후회를 안기고, 어떤 선택은 언제나 좋은 흐름을 만들어낸다.
경력기술서를 꾸준히 작성하면 이러한 판단의 흐름이 선명해진다.
무엇을 기준으로 결정을 해야 나다운 선택이 되는지,
어떤 판단은 나의 세계관과 어긋나는지,
어떤 선택이 나를 성장시키는지 기록을 통해 보이기 시작한다.
판단의 일관성은 곧 사업의 일관성이 된다.
그리고 사업의 일관성은 브랜드의 무게를 만든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기록하며 살아가다 보면 어느 날 문득 한 가지 감각이 찾아온다.
나는 누군가의 조직 이름 뒤에 숨어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내 이름을 걸고도 일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감각.
누군가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방향으로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는 확신.
이 조용한 확신이 자리 잡는 순간, 창업은 결심이 아니라 흐름이 된다.
억지로 용기를 짜내는 일이 아니라,
내가 걸어온 길이 자연스럽게 밀어주는 다음 단계가 된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경력기술서를 매일 쓰는 것을 추천한다.
이 사소한 습관이 결국 한 사람의 세계관을 만들고,
그 세계관이 창업이라는 거대한 선택을 지지하는 기반이 된다.
기록은 사람을 정리한다. 정리는 판단을 명료하게 한다.
명료함은 자립을 만든다. 그리고 자립은 결국 내 이름 하나로 세계를 견딜 수 있는 힘이 된다.
우리가 창업을 준비한다는 것은 새로운 아이템을 찾는 일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세계를 구축하는 일이다.
그렇게 구축된 세계 위에서만 사업은 오래 버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