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복받은 며느리

by 정효진


한국도착 예상시간은 7시였다. 비행기가 20분 늦게 떴다. 다행히 찡그러진 얼굴은 인천공항 도착 후 다시 펴졌다. 비행기는 정확히 7시에 도착했다. 기장님도 나만큼이나 한국에 오고 싶었나 보다. 빛의 속도로 출국심사를 끝냈다. 신이 났다. 그리고 한 시간 뒤에 양재행 버스를 탔다. 우리 짐이 꼴등으로 나왔다. 일희일비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원래 계획은 시댁에서 하룻밤을 묵고 바로 친정으로 내려가는 거였다. 어차피 둘째 아이 다음 주 병원예약으로 올라와야 했다. 계획대로 할 수 있었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부모님께 여쭤보니 다음 주 티비선 설치에 맞춰 나머지 짐을 옮긴다고 하셨다. (6층에서 4층으로 이사하신다.) 그 큰 가구들은 우리 도착 전 두 분이서 모두 옮기시고 잔짐만 남은 상태였다. 어머니는 후유증으로 몸도 안 좋으신 듯했다. 차마 그대로 내려갈 수 없었다.


"저는 29일에 내려갈게요. 그전에 제가 조금씩 짐을 나를게요."

어차피 친정과 시댁의 일정만 바뀐 것뿐이라 나에겐 큰 변화도 아니었다. 짐을 옮겨드리고 내려가서 푹 쉬는 게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괜찮겠어? 친정어머니가 기다리실 텐데..."

"그럼요. 괜찮아요."

아버님은 조심스레 되물으셔도 내심 기쁘신 표정이셨다. 오매불망 보고 싶었던 손자들과 성탄절을 보낼 수 있는 기쁨을 어떻게 다 헤아리랴.


어렵지 않게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건 나의 복 때문이다. 나는 시댁에 있으면 종종 여기가 내 집인지 헷갈린다. 올 때마다 시아버지는 매번 카드를 내밀고, 외식을 하자며 손을 이끄신다. 시어머니는 '니 편한 대로 해라.' '마음껏 먹어라.' '애들은 두고 나가서 놀고 와라'라는 말을 달고 사신다. 이렇게 10년 차다. 분명히 시댁인데 시부모님이 내 눈치를 보느라 바쁘시다. 며느리는 큰방에 누워 낮잠을 자다 일어난다. 아이들은 할아버지와 오손도손 놀고 있다.


내어주시는 게 익숙한 분들. 할아버지, 할머니의 내리사랑이 안 그러겠냐만은 몸으로 톡톡히 느끼는 나는 더욱 와닿는다. 어제는 성탄절 이브 축제에서 타오신 극세사 이불을 궁금해하는 손주에게 바로 내어주셨다. 한국 왔다고 김치를 어마어마하게 먹어대는 아들에게 조금 핀잔을 주자 바로 화살이 날아온다.

"나는 우리 손주가 김치 좀 거덜 냈으면 좋겠다. 다 먹어도 잘 먹어주기만 하면 고맙다."

아버님도 옆에서 거드신다.

"그럼 그럼. 우리 손주가 거덜 내는 거야 좋지."


사실 한국 오기 전 바로 친정으로 가고 싶기도 했다. 도착시간이 늦어져 지방인 친정으로 가기 어려워 시댁으로 짐을 푼 것이었다.


금쪽같은 손주가 얼마나 보고 싶으셨을까. 그리고 손주들과 성탄절 예배를 같이 볼 수 있음에 또 얼마나 기쁘셨을까. 가만히 돌이켜보니 난 참 복이 많은 며느리인데 공기 같은 일상에 나의 복을 잊고 살았다. 단 한 번도 시아버지, 시어머니 때문에 힘든 적이 없었다. (남편은 셀 수가 없다.) 평생을 주는 것에 익숙한 시어머니와 받는 것에 익숙한 며느리. 어찌 보면 찰떡궁합이다.


시댁에 와서 고생한다고 아버님이 돈도 두둑이 입금시켜 주셨다. 고생은 아버님 어머님이 하시는데 나는 돈도 받고 칭찬도 받고 열심히 놀고먹고 있다. 결혼생활동안 남편이 꼴 보기 싫어도 시부모님 속상하실까 봐 넘어간 적이 수두룩뺵빽하다.


이제 나이가 한참 드신 시부모님과 부모님을 생각하면 문득문득 마음이 저려온다. 사람은 늙고 죽는다는 만고의 진리 앞에서도 슬픔은 어쩔 수 없다. 마음 같아선 멋진 검은색 세단과 더 두툼한 용돈도 드리고 싶다. 하지만 검은색 세단은 못 해 드린다. 대신 손주들을 더 보여드리고, 직접 만든 요리도 대접해 드리고 다 같이 둘러앉아 즐겁게 대화하며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해 보련다. 훗날 후회의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지금 잘하자. 비록 날라리 며느리지만 날라리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효도를 해보자 다짐해 본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