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시절 만난 첫사랑과 70년을 행복하게 살다가 같은 날 몇 시간 차이로 세상을 떠난 노부부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던데..
하긴, 30년도 더 된 이야기지만, 나도 첫사랑이 영원할 거라 믿었었다.
대학에 입학한 후 한동안 나는 우울했다.
남중, 남고를 졸업한 나에게 대학은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곳이어야 했다. 여학생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캠퍼스 커플이라는 것도 되어보고.
그런데 한 학기가 지나도록 연애는커녕 여사친 하나 없는 현실 앞에서, 캠퍼스의 낭만이라는 건 결국 드라마 속 이야기일 뿐인가?라는 생각에 허탈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인트 동문회 신입생 환영회에서 만난 적이 있던 여대 친구들에게 동문회 개최 안내 전화를 돌리던 중이었다. 의례적인 안내 멘트를 마쳤을 때, 한 친구가 물었다.
"용건이 그게 다야?"
순간 당황했다. "왜?"
"난, 네가 혹시 영화라도 같이 보자고 할 줄 알았지."
심장이 뛰었다. 전화기 너머 그녀의 목소리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보면 되지. 이번 주말에 볼래?"
그날이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햇살이 좋은 5월의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무슨 영화를 봤는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극장을 나서며 "배고프지 않아?"라고 물었던 것, 밥을 먹고 나서도 "커피 한잔 할까?"라며 시간을 붙들었던 것, 그렇게 함께 있었던 그 시간이 좋아서 다음 약속을 잡으면서도 벌써부터 기다려졌던 그 설렘만은 또렷하다.
그 후로 우리는 자주 만났다.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때로는 그냥 걷기도 했다. 함께 있으면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몰랐다. 늘 가던 카페에서, 늘 마시던 걸 마시면서도 그 시간이 그렇게 즐거웠다.
언제 누가 먼저였는지는 모르지만, 어느덧 우리는 손을 잡고 나란히 걸었고, 그때 문득 한 노래 가사가 떠올랐다. "내 인생의 반은 그대에게 있어요, 그 나머지도 나의 것은 아니죠."
왜 그때 그 노래가 떠올랐는지 모르지만, 이젠 친구가 아니라 내가 지켜주어야 할 사람이라는 생각과 함께, 명치가 아려오는 것 같았다.
그 후로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하루가 금방 지나갔고, 집 앞에 도착해서도 들여보내기가 싫어 골목길을 몇 번이나 돌고 또 돌았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 보고 싶을 때면 무작정 학교 앞으로 달려가거나, 집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늦은 밤 귀가하는 그녀와 짧은 포옹을 하고 집으로 가는 막차를 놓치지 않으려 숨이 터지도록 뛰어가곤 했었다.
그렇게 우리는 사랑을 했다.
그 시간이 영원할 거라 믿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까지나 순진한 1학년일 수는 없었다. 3학년이 되면서 각자 진로를 고민하게 되었고, 우리 앞에 놓인 길이 너무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도 사랑한다면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함께라면 어떤 길이든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녀는 달랐다.
학생운동에 진심이었던 그녀는 자신이 가려는 길이 많이 힘들지만 그래서 가야만 하는 길이라 여겼고, 그 길이 나까지 힘들게 만들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널 너무 사랑해. 그런데 그래서, 널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집으로 전화해도 연락이 되지 않았고, 집 앞에서 몇 시간이고 기다려봐도 그녀를 만날 수는 없었다. 그녀의 친구들을 만나고 여기저기 수소문을 했지만, 그녀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내 인생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그러다 교대역에서 우연히 그녀를 마주쳤을 때,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겨우 서른이 되었을 뿐인데, 그녀는 많이 지쳐 보였다. 예전의 그 환한 웃음도, 반짝이던 눈빛도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는 내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조용히 미소 지었다. 내가 평범하게 잘 살고 있다는 것에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그래, 이렇게 사는 게 맞아. 넌 이렇게 살아야 해."
그녀는 연락처도 알려주지 않았다. "부디 건강해"라는 말만 남긴 채 돌아섰고, 나는 그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결국 붙잡지 못했다.
그 후로 그녀를 영원히 볼 수 없었다.
가끔 생각한다. 첫사랑은 영원히 아쉬움으로 간직되어 있기에 아름다운 것이라고.
그해 5월의 햇살처럼, 골목길을 함께 걸었던 그 시간처럼, 아름다운 기억으로만 남겨두었어야 했다.
두 번째 만남은 갖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를 생각하면 이제 환한 웃음과 반짝이던 눈빛 대신, 지쳐버린 그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