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CDN 전문기업 씨디네트웍스 탄생의 비화
데이콤(우리나라 최초의 데이터통신 전문기업으로 2000년에 LG그룹에 인수되어 LG텔레콤에 통합된 이후 현 LG 유플러스가 되었다) 전화사업부문 영업관리팀에 근무하던 나는 1998년 4월 대대적인 조직개편에 따라 여러 사업본부가 하나로 통합된 사업부문의 부문장 직속 총괄팀으로 발령받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당시 대리였던 고사무열 사장을 만나게 된다.
그는 국제전화 사업본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한번 들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특이한 이름과 길거리에서 윗사람을 만나면 큰소리로 “충성”이라고 외치면서 경례를 하는 눈에 띄는 행동 때문에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나는 그가 윗사람에게 큰소리로 경례하는 것을 보고 윗사람에게 과잉 충성하는 타입의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함께 일하게 된 것이 그다지 달갑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와 나는 총괄팀 내에서도 같은 파트에서 일하게 되었고, 더구나 그는 팀장을 대신하여 나에게 업무지시를 하는 직속상관이 되었다.
그런데 함께 일을 해보니 우리는 서로 닮은 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영학과를 졸업했고 머리 회전이 빠른 편이지만 성격이 급해서 실수가 많고, 욱하는 성격에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서로 자기가 옳다고 우기고, 그러다가도 상대방의 의견이 더 낫다고 생각되면 바로 꼬리 내리고 인정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친해지는 자신만의 노하우를 가졌다는 것이다. 닮은 점이 많아서인지 우리는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자기가 옳다며 목청을 높이기 일쑤였지만 그래도 서로 통했기 때문에 금방 친해졌고 함께 일하는 방법을 터득해갔다.
연세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LG-EDS에 입사하면서 본의 아니게 개발자로서 사회에 입문했던 그는 대기업에서 비즈니스 경험을 쌓아서 언젠가 자기 사업을 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그 꿈을 이루기 위해 '96년 6월 LG-EDS를 그만두고 데이콤에 입사했고 데이콤 자회사인 DST(Dacom System Technologies)를 거쳐 국제전화사업본부에서 열심히 사업 경력을 쌓고 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사업부서로부터 관리부서인 총괄팀으로 발령이 났으니 마음이 편할 리 없었을 것이고, 다시 사업부서로 돌아가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당시 데이콤에는 직원들을 위한 인사제도가 있었는데, 한 부서에서 동일업무를 2년간 하면 소속 팀장 동의 하에 다른 부서로 이동을 할 수 있었고, 3년이 지나면 팀장의 동의 없이도 프로야구의 자유계약선수(Free Agent)처럼 자기가 가고 싶은 부서를 선택해서 이동할 수 있었다. 물론 이동하려는 부서의 팀장과 본부장의 승인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상대방을 내 사람으로 만들어 구워삶는 건 그의 특기였기 때문에 우리 팀의 팀장님은 순순히 승낙한 상태였고 시간만이 문제였다. 마침내 '99년 6월, 그는 모두의 부러움 속에 당시 떠오르는 사업분야였던 호스팅사업팀으로 영광의 탈출을 한다. 얼마 후 자유의 몸이 될 나를 꼭 불러주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말이다.
호스팅사업팀은 당시 데이콤의 기술고문을 맡고 있던 John Milburn의 제안으로 미국에서 뜨기 시작한 데이터센터 사업을 시작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마침 IMF 사태의 여파로 금융권 구조조정이 일어나면서 한일은행이 상업은행과 통합되어 한빛은행(현 우리은행)이 되었고, 그 결과 구 한일은행 전산센터가 급매물로 나오게 되었다. 덕분에 데이콤은 전산센터를 헐값에 인수하여 IBM에 IDC 설계를 의뢰하고 대대적인 공사를 하여 '99년 10월 한국인터넷데이터센터(KIDC)라는 이름으로 오픈을 했는데, 국내 최초의 전문 IDC였다.
전산센터를 인수하여 보수공사를 하고 KIDC를 오픈까지 실무 총괄 업무를 맡았던 고사무열 과장은 회사 내에서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고, ‘국내 최초의 데이터센터 설립 실무 총괄’이라는 그럴듯한 꼬리표가 붙으며 KT, 하나로통신, 두루넷 등 IDC 사업에 진출하려는 경쟁사의 영입 대상 목록 1순위에 오르는 인물이 된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본인의 장기를 살려 3사의 중요 인물들과의 인맥을 열심히 쌓았으며, 이는 얼마 후 씨디네트웍스를 창업할 때 그리고 고전을 면치 못하던 벤처 초기에 큰 힘이 되었다.
최초의 데이터센터가 생겼다고는 하지만,
'90년대 말 당시의 인터넷 환경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99년 4월 하나로통신이 전화선을 이용한 ADSL을 상용화하고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3만원 정액제를 도입하면서 ADSL 가입자가 증가하기 시작해서 사용자 구간(Last Mile)의 속도는 빨라졌지만, 문제는 인터넷사업자( ISP, Internet Service Provider)들의 백본(Backbone)과 그 연결구간인 미들마일(Middle Mile)에서 발생하는 지연현상과 패킷손실이었다.
1999년 어느 날 당시 KIDC의 고객이었던 imbc의 시스템운영팀장이 툭툭 끊기는 동영상 때문에 고민을 하다가 고사무열 과장에게
“인터넷 동영상을 끊기지 않고 볼 수 있게 해주는 솔루션이 있다면
기꺼이 돈을 낼 수 있을텐데..”
라며 그런 솔루션을 제공해 줄 수 있는지 문의를 해 왔고, 이 일은 고사무열 과장에게 자극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 첨단사업이라고는 하지만 IDC사업은 서버를 둘 공간을 빌려주고 인터넷회선을 연결해 주는 부가가치가 별로 없는 단순한 사업이었기 때문에 부가적인 솔루션을 제공해주면 기꺼이 돈을 내겠다는 고객의 요구는 지금 생각하면 당연하지만 당시로서는 참신한 것이었다.
그때 마침 그는 KIDC 설립 과정에서 알게 된 잉크토미코리아(Inktomi Korea)의 이종경 차장으로부터 imbc의 요구에 딱 들어맞는 솔루션에 대해 듣게 된다. 바로
닷컴열풍이 시작되던 ’98년에 설립되자마자 나스닥에 상장돼서 천문학적인 펀딩을 받고 ‘99년 4월부터 서비스를 개시한 Akamai의 CDN이라는 서비스에 관한 얘기다.
인터넷 주요 지점에 캐시서버를 미리 설치해두고, 고객의 콘텐츠를 캐시해서 사용자로부터 가까운 곳에서 전달해주면 병목구간에서 발생하는 속도지연을 방지할 수 있다는 설명은 정말 그럴듯한 것이었다.
고사무열 과장은 당장 사업기획에 착수했고, 데이콤 사내벤처의 형태로 CDN 사업에 진출하는 기획안을 만들었다. 사내벤처로 사업을 시작하면 실패에 대한 위험을 줄일 수 있고, 사업이 잘 돼서 독립하게 되면 자신이 그리도 갈망했던 창업을 하는 것과 똑같은 결과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시작도 하기 전에 곧 벽에 부딪혔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국토면적이 워낙 넓어서 주마다 캐시서버를 두는 것이 효과가 있겠지만, 미국의 한 개 주 정도의 면적을 가진 우리나라에서 과연 지역 간의 거리가 인터넷 속도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까 하는 것이었다. 그는 고민 끝에 우리나라는 지역 간 거리 때문이 아니라 메이저 ISP의 백본 간의 연결구간의 병목현상이 그 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캐시서버는 지방의 각 지역에 둘 것이 아니라 메이저 ISP들의 백본 네트워크에 두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그렇다면 상관례로 비추어 볼 때 경쟁사인 KT나 하나로통신의 IDC와 백본 네트워크에 데이콤의 캐시서버를 두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사내벤처는 답이 아니었고 완전히 독립회사로 창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다.
문제는 돈이었다.
하지만 고사무열 과장의 행운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KIDC 오픈 직후 약 10여 개의 회사가 KIDC에 사무실을 임대하고 있었는데, 그중에 쓰리알소프트라(3R Soft)는 벤처기업이 있었다. 그는 자금 형편이 좋지 않았던 이 회사에 장기적인 고객 확보 차원에서 요금할인 등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해 주었고, 덕분에 쓰리알소프트의 유병선 사장과 호의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러다가 쓰리알소프트의 사업이 호전되고 투자 유치도 성공해서 유병선 사장은 더 이상 돈 걱정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병선 사장이 고사무열 과장을 불러서 믿을 수 없는 제안을 한다. 고사무열 과장이 좋은 아이템을 갖고도 돈이 없어서 창업을 못하고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5억을 빌려줄 테니 직접 창업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라고 권유를 한 것이다.
이렇게 고사무열 과장은 본인이 뿌려둔 씨앗이 행운의 열매가 되어 5억이라는 종잣돈을 얻게 되었고, 용기를 내어 아파트를 담보로 빌린 2억을 합쳐서 설립자본금 7억으로 드디어 꿈에 그리던 본인의 회사를 창업하게 되었다.
-- 2편에서 계속
1편 - 한국 최초의 CDN 전문기업 씨디네트웍스 탄생의 비화
3편 - 통신 3사의 공동 투자, 첫 번째 그림의 완성
7편 - 온라인게임 5개사 수주, 시장 개척을 통한 진정한 1위 도약
8편 - 국내 최초, 어쩌면 세계 최초 HD 고화질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13편 - 맨주먹으로 동경에 서다, 일본법인 설립 - 1
14편 - 맨주먹으로 동경에 서다, 일본법인 설립 - 2
18편 - 해외사업을 넘어 글로벌기업이 되기 위한 조직개편 - 1
19편 - 해외사업을 넘어 글로벌기업이 되기 위한 조직개편 - 2
20편 - 글로벌 조직 운영을 위한 과감한 결단, Global PI Proje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