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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동아빠 구재학 Feb 04. 2023

‘콘도팅’이라고 들어봤나?

그 시절 철부지들의 귀여운 일탈

핸드폰이 없던 시절, 철없는 영혼들은 소소한 일탈을 즐겼다.


집전화에 발신자번호가 표시되지 않는다는 것은 불편하기도 하지만 철부지들에겐 익명에 숨어 장난을 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개인정보 보호 개념이 없던 때라 집전화를 개통하면 ‘전화번호부’라는 두꺼운 책을 주었는데 전국의 집전화 가입자의 이름, 주소, 전화번호가 다 들어있는 책이다. 그중에 아무 번호나 골라서 장난전화를 하는 거다.

“여보세요, 여기 슈퍼맨인데요, 원더우먼 있나요?” 

이때 상대방도 철부지라면 

“원더우먼은 없고 소머즈는 있는데요”

라고 응수하는 식이다. 그 다음은 없고 그냥 재미있는 숏토크하고 한번 웃고 넘기는 것이었다.

응답하라 1988 - 전화번호부 외우기가 취미였던 정봉이


그런데 익명에 기댄 장난 중에 ‘콘도팅’이라는 게 있었다. 

콘도에 가서 아무 방번호나 눌러서 목소리가 같은 또래다 싶으면 몇 살인지 몇 명이 놀러 왔는지 묻고 나이대와 인원수가 얼추 맞으면 우리 쪽 방으로 초대하거나 상대방 측 방으로 놀러 가서 노는 거다. 그러다가 서로 마음에 맞으면 집으로 돌아가서도 만남을 이어가고 아니면 한번 재밌게 놀고 쿨하게 헤어지는 것이었다.


1990년 여름, 대학에 입학해서 처음 맞는 방학을 맞아 친한 친구들 다섯 명 중 지방 출신인 세 친구들의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서울에 사는 두 명이 부산 친구집에 놀러 가서 놀고, 그다음에 셋이 대구 친구집으로 놀러 가고, 마지막으로 넷이 전주 친구집으로 가서 완전체가 되는 것이었다.

그중 첫 번째 방문지였던 부산에 갔을 때였다. 서울에서 같이 내려온 친구의 누나가 친구들과 해운대 한국콘도로 놀러 왔다는 얘기를 듣자, 한 친구가 

"우리 콘도팅 할래?" 

하는 것이었다. 우리 학교는 여학생이 매우 적은 편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우리 과는 여학생이 딱 한명뿐이어서 여학생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콩닥콩닥 하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바로 한국콘도로 갔고, 친구가 어머니에게 전화해서 누나가 묵고 있는 방번호를 알아낸 다음에 방으로 쳐들어갔다. 누나는 깜짝 놀랐고 누나의 친구들은 갑작스러운 어린 영계들의 방문에 환호했지만, 우리의 목적은 늙은(대학교 3학년) 누나들이 아니라 콘도팅임을 밝히고 전화만 사용하고 곧 나가겠노라고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콘도 전화기를 들어 방번호로 하나씩 전화를 걸어 나갔다. 그러다가 5번째쯤 걸었을 때 우리 또래의 여학생이 전화를 받았다. 물어보니 우리랑 같은 1학년이었고 여자만 다섯 명이란다. 우리는 셋이었지만, 우리야 손해 볼 것이 없었다. 그녀들은 흔쾌히 자기네 방으로 놀러 오라고 초대했고, 1시간 후에 방문하기로 하고 전화를 끊은 다음에 머리를 감고 무스를 바르고 꽃단장을 했다. 그쪽 여학생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으리라. ㅋㅋ


그렇게 방문한 여학생들은 서울의 모 여대 체육학과 학생들이었다. 각자 전공이 배구, 핸드볼, 농구, 축구, 태권도라고 했는데, 그중 핸드볼과 태권도가 가장 청순해 보였고 다른 학생들은 좀 쎄보였다.


첫 시작은 좋았다.

서로 소개하면서 즐겁게 술잔을 기울였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술마시기 게임을 시작했고 술에 취하자 운동선수 언니들이 힘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굳이 요리를 해주겠다며 소금이 덩어리째 들어간 것 같은 정체 모를 안주를 들이밀고 다 먹기 전에 못 나간다며 귀여운 협박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밤새 술 마시고 놀다가 졸다가 하다 보니 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밤새 놀면서 다른 학생들은 본모습을 다 보여줘서 환상이 깨졌지만 태권도는 밤새 조용하면서도 청순한 모습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때 여학생들이 동틀 무렵의 해변을 걷고 싶다며 나가자고 했다. 우리는 술에 취해 나가기 싫었지만 쎈 언니들이 잡아끌어 해변으로 나갔다. 막상 나오고 보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라 나오길 잘했다 싶었다.


그런데.. 그때 우리는 보았다.

밤새 청순함을 잃지 않고 말수도 적어 우리를 설레게 했던 태권도 아가씨의 걸음걸이를..

그녀는 마치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장수처럼 어깨를 건들거리며 모래사장을 저벅저벅 걷는 것이었다.

밤새 가졌던 우리의 환상은 그렇게 깨져버렸다.



아침을 만들어주겠다는 호의(?)를 정중히 거절하고 작별을 하려는데, 우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서울에 돌아가면 꼭 전화하라며 핸드볼 언니가 대표로 자기네 집전화번호를 적어줬지만, 우리 중 누구도 그녀들과 재회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콘도팅은 웃프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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