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 3사의 공동 투자, 첫 번째 그림의 완성
그는 원래 데이콤의 사내벤처로
CDN(Content Deivery Network) 사업을 시작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국토가 좁은 대한민국에서는 인터넷의 품질이 저하되는 원인이 지역적 거리보다는 KT, 데이콤, 하나로통신 (2000년 당시 유선 인터넷 매출 순위는 KT, 데이콤, 하나로통신, 두루넷, 드림라인 순이었다.) 등 메이저 ISP 사업자들의 백본 네트워크 간 연결구간에서의 병목현상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린 후로 사업계획을 크게 변경할 수밖에 없었는데, 결과적으로 이것이 넓은 국토를 가진 미국에서나 필요한 CDN 사업이 대한민국이라는 좁은 땅에서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개념적인 토대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회사 설립 후 단기간에 성장을 할 수 있었던 단초를 마련한 매우 중요한 결정이 되었다.
당초 사내벤처 사업계획으로부터 변경된 계획은 크게 2가지다.
첫 번째는 사내벤처가 아니라 통신 3사로부터 출자를 받아 독립법인을 설립하는 것이다.
당시 인터넷 통신사업의 90% 이상의 시장점유율을 점하고 있었던 메이저 ISP 3 사인 KT, 데이콤, 하나로통신으로부터 동시에 투자를 받아 회사를 설립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원가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네트워크를 주요 주주인 3대 통신사로부터 사업제휴라는 명목으로 무상으로 지원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 계획은 메이저 사업자들로부터 호의적이면서도 중립적인 지위를 확보하여 CDN 사업을 위해 가장 이상적인 노드(Node)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고, 두 번째 계획은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다고 할 수도 있으나 당시 트래픽 규모가 서로 비슷한 ISP 사업자들 간에는 망대망 연동을 할 때 상호 무상으로 연동을 하거나 차액만 정산하는 것이 상관례였기 때문에, 사업 초기에는 메이저 ISP들이 자신들이 출자한 회사에 투자 차원에서 무상으로 네트워크를 제공하고 사업이 진행되고 고객이 확보되면 우리가 넘겨주는 트래픽과 우리가 넘겨받는 트래픽을 상계 처리하여 무상으로 사용한다는 것이 그럴듯한 아이디어였고, 그렇게만 된다면 저렴한 원가를 통한 가격 파괴로 전용회선 중심의 시장 패러다임을 흔들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방향을 바꾸기로 한 이후에 고사무열 사장은 통신 3사의 출자를 받아내기 위해 부지런히 발품을 팔았다. 그도 그럴 것이 90년대 중반부터 불어닥친 닷컴 열풍이 99년 말부터 급격하게 식어가면서 벤처투자자들의 지갑이 거의 닫힌 상태였고 고사무열 사장 본인은 살고 있었던 아파트 외에는 다른 재산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왕성하게 투자를 했던 통신사들도 버블이 꺼지기 시작하자 신규투자를 제한했고, 더욱이 대규모 트래픽은커녕 아직 회사도 설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네트워크를 무상으로 제공해 달라는 것은 통신사 입장에서는 봉이 김선달이 따로 없는 무리한 요구였다.
그 무렵 대한민국에서 제일 먼저 CDN 사업을 시작하겠다는 고사장의 포부가 무색하게도 2000년 2월 전문 CDN 사업자를 표방하며 필라민트네트웍스(대표 오명철)가 설립되었고, 이미 리눅스 기반 호스팅 사업을 하고 있었던 웹데이터뱅크(대표 김대신)가 CDN 사업에 진출하겠다고 선언을 하였다. 실현할 수 있을 것 같은 멋진 사업계획은 있으나 총알이 없어서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에 미래의 경쟁자들이 먼저 치고 나가는 형국이 된 것이다.
그때 마침 전편에서 얘기했던 쓰리알소프트의 유병선 사장이 선뜻 5억을 빌려주겠다고 제안했고, 뜻밖의 횡재에 힘을 얻은 고사무열 사장은 유일한 재산인 아파트를 담보로 2억을 빌려 초기 투자비로 예상했던 7억을 마련했고, 드디어 회사를 설립할 수 있게 되었다.
고사장은 CDN 사업을 시작하기 위한 두 가지 중요한 계획이 구체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선 회사를 설립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고민을 했지만,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오기가 발동했고 미국에서 이미 검증되었으나 한국에는 아직 임자가 없으니 승산이 있다는 판단을 했다. 그렇게 해서 2000년 5월 27일 ‘주식회사 씨디네트웍스’라는 이름으로 법인 등기를 하게 되었다. (법인명을 정하기 위해 여러 개의 후보 이름을 경합을 했으나 확 끌리는 이름이 없었다. 3대 2로 반대의견이 우세했지만 딱히 대안이 없었기에 고사장이 제안했던 ‘CDN은 CDNetworks’라는 단순한 의미의 이름으로 일단 법인 등록을 하고 나중에 사명 변경을 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 이름을 20년 넘게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법인 설립 이후에 통신 3사의 투자와 사업제휴를 이끌어 내려는 발걸음은 더욱 분주해졌다.
고사무열 사장은 회사의 회사의 성패가 여기에 달려있다는 심정으로 CSO였던 박신권 이사와 함께 열심히 뛰어다녔다. 3사의 실무 담당자들뿐 아니라 고위 임원들의 사무실은 물론 집까지 열심히 쫓아다녔는데, 당시 데이콤과 하나로통 신은 1위 사업자인 KT의 행보를 따라가는 형국이었기 때문에 KT의 결정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절박한 심정에 고사무열 사장은 KT 임원의 집으로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제발 살려주십시오. KT가 도와주지 않으면 우린 다 죽습니다”라면서 울며 빌기까지 하였다.
궁즉통(窮卽通), 절박함이 통해서였을까?
KT 임원은 “KT는 원래 위험한 의사결정은 잘 하지 않으니 데이콤과 하나로통신의 투자를 먼저 유치한다면 KT도 투자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만약 두 회사의 투자를 유치하는데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돕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마침내 2000년 8월 우리는 KT와 “CDN 사업 협력에 관한 기본합의서”를 체결했는데, 이것은 다분히 KT의 경쟁사인 데이콤과 하나로통신을 끌어들이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 예상했던 대로 KT를 견제하려는 두 회사의 임원들과 실무자들이 자극을 받았고 우리는 이들을 설득하여 사업제휴보다 더 강력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지분 투자를 결정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해 9월 업계 2, 3위인 데이콤과 하나로통신이 동시에 씨디네트웍스에 투자를 하였으며, 이것을 구실로 하여 그 해 10월에 마침내 KT의 투자의사결정을 이끌어 내었다. 이로써 고사무열 사장이 구상했던 사업계획의 첫번째 단계가 완성된 것이다.
-- 4편에서 계속
1편 - 한국 최초의 CDN 전문기업 씨디네트웍스 탄생의 비화
3편 - 통신 3사의 공동 투자, 첫 번째 그림의 완성
7편 - 온라인게임 5개사 수주, 시장 개척을 통한 진정한 1위 도약
8편 - 국내 최초, 어쩌면 세계 최초 HD 고화질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13편 - 맨주먹으로 동경에 서다, 일본법인 설립 - 1
14편 - 맨주먹으로 동경에 서다, 일본법인 설립 - 2
18편 - 해외사업을 넘어 글로벌기업이 되기 위한 조직개편 - 1
19편 - 해외사업을 넘어 글로벌기업이 되기 위한 조직개편 - 2
20편 - 글로벌 조직 운영을 위한 과감한 결단, Global PI Proje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