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볕 색깔
섬진강 칠십리 길
- 김 중 근
아침나절 하늘이 회색인데, 새벽 꽃샘 바람이 구름을 몰고오더니 파랑과 솜같이 부드러운 흰 구름은 모두 사라진다. 하늘은 오후 내내 계속될 칙칙하고도 느린 푸른색으로 우울함을 만들고 혼합된 탁한 색으로 일상적인 행동마저 지배한다. 출근 길 꽃샘 바람이 바지가랑 사이로 따갑게 파고든다. 한 겨울에도 곱아보지않던 손마디가 굽혀지지 않을 정도로 얼얼하다. 눈 속에서 이쁜 꽃 봉우리를 열게 할 꽃샘 바람이 봄을 알리는 봄길을 재촉하고 있지만 마음은 하얗게 얼어붙는다.
나는 지금 산수유 섧게 피는 꽃길 칠십리를 그린다. 바람은 이곳, 저곳으로 무작정 불어대지만 아무 곳에도 안착(安着)하지 못한다. 강물은 열심히 바다로 흘러 바다를 채우려하지만 이 우주가 있는 한 영원히 채울 수 없다 . 그렇지만 어김없이 물은 다시 강으로 흘렀다가 또 다시 바다로 흐르듯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섬진강의 봄은 우리에게 영원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동백 꽃이 서서히 빛을 발할 즈음이면 3월 산동에서 노랑색 봄 화신(花信)이 시작되어 섬진강 칠십리 길을 4-5월초까지 산수유와 벚나무 꽃으로 장식된 또 다른 세상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골골이 채색된 노랑 산수유 꽃이 하나하나 개별로는 작고 볼품없지만 그 군락지에 뛰어들면 하늘도, 물도, 노랗게 별천지를 만든다. 심지어 내 자신의 마음까지도 노랗게 복사된다. 그것을 한참 바라다보면 늘 내 자신 모든 것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하고 귀찮았던 처지에 어느새 삶의 희망이 내린다. 내 눈동자 속에 박혀있는 산동의 노란 산수유는 춥고 매서웠던 한철의 시련을 흥겹게 한다. 한철을 골방에 움추리고 활기를 못피고 있다가 모처럼 기지개를 펴고 섬진강따라 오는 봄을 실감하니 흥겨워서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그 흥겨움이 나 자신을 속박했던 속물들로 부터 벗어날 힘을 갖게한다. 어디서 어떤 욕심을 갖게하고 있을지 모를 속기(俗忌)들을 뒤로하고 모든 것은 바람을 쫓는 것과 같이 어리석을 뿐임을 무소유의 자연을 통해 깨닫는다.
섬진강 줄기를 따라 하동 쌍계사로부터 보리암 남해도를 잇는 19번도로에 화들짝 핀 벚꽃이 도열해 있는 터널속을 지나면 마치 꿈속을 지나는 것 같다. 쌍계사 입구를 지나다보면 화개장터를 지나게된다. 화개장터라는 이름은 조영남의 '화개장터'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노래 가사 말과는 달리 번성했던 장터는 졸속으로 급조해 놓은 듯... 옛정취가 많이 퇴색된 듯 하다. 현대화된 장터는 생각보다 물가가 비싸다. 구례군과 하동군의 경계에 있는 화개장터는 섬진강을 이용하는 수운(水運)때문에 발달한 장터였는데, 화개장이 한창일 때는 남해 거제 삼천포 등 남해안의 해산물이 이곳까지 실려와 구례 남원 함양 등지의 내륙 농산물, 지리산에서 나오는 임산물들과 교환됐을 정도로 광복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7대 시장 중의 하나로 손꼽혔던 곳이다. 산을 하나두고 어울어진 호남과 영남의 말 섞임이 자연스럽게 어울어지는 곳이다.
이곳 화개장을 풍성하게 했던 예인집단 남사당패를 모델로 삼아 쓴 김동리 소설의 무대도 화개장터다. 지리산을 사이에 두고 화개는 비가 내리는데 남원은 폭설이 내리기도 한다. 이 곳에서 재배된 차나무는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 소담스러운 흰꽃을 피우 는데 이 꽃이 지고 나면 동백같이 동그란 씨를 맺고, 그 화개차로 끓여낸 차는 향기가 짙고 빛깔이 뛰어나다. 맛 또한 연하고 부드러워서 이곳 사람들은 그 맛을 어머니의 젖맛에 비유한다. 자연이 주는 절대적인 힘을 이 화개차 한잔에 느낄 수 있다. 차 한잔에 정신이 맑아져 찻잎처럼 온유하고 댓잎처럼 푸른 선비 정신을 닮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차나무는 하동과 산청, 구례 등 섬진강 따라 계단식 작은 병풍처럼 펼쳐져 초봄에도 초록색 군락을 이룬다.
남명 조식은 화개동을 유람하고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삼백리길 바다와 산을 유람했지만 오늘 하루 동안에 세 군자(고려 말 섬진강변에서 은둔한 선비인 섯바위의 한유한, 화개의 정여창, 옥종의 조지서)의 자취를 다 보았다. 물을 보고 산을 보다가 그곳에 살던 사람을 보고 그 세상을 보니 산 속에서 10일간 품었던 좋은 생각들이 하루 사이에 언짢은 생각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훗날 정권을 잡는 사람이 이 길로 와 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지 모르겠다"고 술회하고 있음을 음미(吟味)해본다. 지리산 자락으로부터 헤메고 돌고 돌아 제 육신도 돌보지 못하고 상처난 마음도 달래지 못한 채 제 갈 길을 잃은 강줄기 처럼 홀연히 귀양왔던 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그러나 이리저리 굽어돌면서 더러워진 마음까지 맑게 만들어 먼길을 가는 섬진강 물을 보면서 험난한 인생의 길이 정말 귀한 것을 담기 위해서 이리저리 뒤섞이고 더러워지면서 결국 흙탕물이 맑은 물이 되어 흘러가는 길임을 알게된다. 그 옛 영화로움과 세월의 덧 없슴이 무상할 뿐이다. 처음엔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 곳을 찾아 나섰지만 가는 길 걸음마다 가벼운 걸음, 맑은 마음으로 섬진강 따라 내 머리와 마음도 점차 맑아진다. 화개를 둘러보고 노래한 시인 묵객들은 이밖에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고운 최치원, 목은 이색, 서산대사, 화담 서경덕, 부사 성여신, 율곡 이이,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등 많은 선비들이 화개를 닮으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서 겨울 산록을 짙푸르게 물들이고 있는 차밭을 둘러보며 화개장터에서 섬진강 은어 한 접시에 지리산 동동주 한 되박이면 온 천하가 내것이 된다.
쌍계사 벚꽃 만개한 구블어진 옛 도로에 차를 한적하게 세우고, 바람에 날리는 눈처럼 하얀 꽃잎이 볼에 닿으면 첫 입마춤같이 달콤한 봄의 온기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산책삼아 벚꽃 터널을 걸어본다. 바람이 부니 잎들이 뒤척거리고, 하얗게 뒤덮힌 가지 사이로 새파란 허공이 뚫린다. 간간히 뚤린 하늘 새로 가는 햇빛 쏟아져 내려 환희의 세상을 연출하고, 햇살에 부딪히기만 해도 눈부시고 바람만 스쳐도 떨어지는 꽃잎이 바닥을 덮어 하얀 융단을 깔아준다. 자연은 신이고 신은 자연이라는 말에 공감하며 발아래 펼쳐진 꽃 길울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자연이 가져다준 황홀함은 다른 생각할 곁을 주지않는다. 미세한 바람이 다가와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 감성에 젖게한다. 감탄사가 여기저기 탄성을 자아낸다. 더욱이 사랑하는 연인 사이라면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환상적인 세계가 된다.
하동과 구례. 광양, 경상도와 전라도를 나누는 듯 이어주는 섬진강을 따라 나 있는 길의 봄기운은 분명 설레임을 준다. 3월 15경이면 오른쪽 백운산 자락은 뽀얀 눈송이를 뿌려 놓은 듯 매화꽃 하얀색이 절정이다. 섬진강의 물빛이 청량한 하얀색과 진한 초록 색을 굽이치게한다. 처음에는 흙탕물로 더러운 잡것들과 함께 뒤범벅이 되어 흐르지만 시간 따라 맑고 올바르게 흐르려하는 제 모습대로 지금 섬진강은 지리산 자락의 골짜기에서 내려온 하얀 모래로 강물을 더욱 투명하게한다. 세상 세파도 함께 흘러내려서, 강물은 기암괴석을 오묘한 돌로 깍아 돌아 흐르고 흘러 강변의 수 백년 묵은 정자나무 아래 앙증맞은 달래, 질경이, 쑥등과 함께 나른하게 봄을 알린다. 강물 타고 나는 바람의 감촉 또한 싱싱하다. 섬진강변 매화마을(섬진마을) 주위로 겨울잠 깨우던 하얀 매화가 4월이면 어느새 떨어지고 연둣빛 잎새는 내년의 매화 축제를 기약하며 푸르름을 과시한다. 매화 축제는 섬진강변 매화마을(섬진마을) 일원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봄소식을 전해주는 매화꽃이 필 무렵 해마다 3월 중순에 열리는 전국에서 가장 빠른 시기에 개최하는 꽃 축제인데,특히 섬진강에 인접한 백운산 동편자락 10만여평에 하얗게 번진 군락을 이룬 매화 단지와 섬진강 풍경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내어 찾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또한 섬진강의 지명(地名) 유래(由來)가 된 두꺼비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섬진 나루터와 청매실 농원의 전통 옹기, 그리고 섬진강 재첩잡이 풍경이 볼거리를 제공하고 강변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다. 작고 가벼운 일에도 안절부절 못하는 우리들 마음에 여유러움이 절로 생긴다.
잠깐 멎었다 지나가는 구름마저 평화스럽기 그지없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모두 새들의 지저귐에 가벼운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매화 향기 그윽한 매화꽃, 변함없이 늘 푸른 대나무, 구름과 신록, 산수유, 벚꽃의 온화한 색깔들로 어울어진 섬진강 물이 더욱 더 짙은 녹색으로 녹아 내리고 이름모를 들풀과 야생화들에게 사시사철 삶의 생명수가 된다. 1박 2일을 다녀와야 할 코스를 하루만에 다녀왔으니 피로감이 일순간 몰려온다. 오는 길에 지리산 온천에서 몸을 푹 담그고난 후, 남원에서 추어탕 한 그릇을 게눈 같이 비우니 긴 여정(旅程)의 피로감도 한숨에 풀린다.
섬진강 꽃길 칠십리 길은 이렇게 꿈의 노랑색과 희망의 초록색과 무소유 흰색의 조화로부터 시작되고, 봄볕을 맞으며 바라보는 기분은 나른한 기운으로 시작된다. 세상이 아무리 아름답다 하지만 푸른색 하늘 위로 아지랑이 퍼지는 섬진강 꽃길 칠십리 길의 봄볕 색깔 만큼 아름답다하지 못할 것이다.
- 2009년 3월 어느 날 연구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