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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이 필요할 때

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53

by 태화강고래

어디서부터인지 무엇 때문인지 쓸쓸함과 외로움이 나를 또 찾아왔다. 추워도 밖으로 나갈까, 쇼핑몰이라도 갈까, 잠이나 잘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영화를 봤다. 6개월쯤, 카페를 운영하는 선배언니가 추천해 줬던 영화이다. 전화통화로 카페 운영과 편찮으신 부모님을 돌보느라 힘든 자신의 녹록지 않은 일상을 이야기하던 언니는 마지막에 "그 영화, 꼭 봐!"를 외쳤었다.


오늘에서야 그 영화를 봤다. 2007년 개봉한 카모메 식당. 보는 내내 잔잔한 미소를 짓게 해 준 편안한 영화였다. 특별한 인물도 사건도 없는, 그저 동네 식당에서 밥 잘 먹고 온 느낌이었다. 단짠맛이 아닌 속을 편안하게 해 주는 담백한 맛 자체였다.


영화가 좋았던 이유를 생각해 봤다.


1> 북유럽 핀란드라는 지리적 위치

숲과 호수의 나라, 산타와 오로라로 유명해서 동화 속에나 존재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북유럽의 신비스러운 나라를 선택했다는 게 신선했다.

멀어서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곳이라 끌렸다.


2> 등장인물들의 방문 이유

아시아 섬나라 일본에 살던 등장인물들이 북유럽 핀란드까지 온 이유는 생각보다 특별하지 않았다. 일상을 벗어나 떠나겠다는 목표 하나로 세계지도를 눈 감고 찍었다는 미도리, 핀란드의 에어기타 대결을 시청한 후 핀란드에 오게 되었다는 마사코. 마음만 먹으면 핀란드도 갈 수 있는 국가 중의 하나였다.


3> 반복되는 일상을 표현

매일 아침 식당 모습이 그려진다. 테이블을 닦고 오픈 준비를 한다. 식당의 첫 손님인 핀란드 청년은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사치에는 집에서 체조(?)하면서 하루를 마무리한다. 외국으로 떠나왔어도 일상은 반복된다. 잠시 떠나온 여행지의 낯섦이 사라진다. 등장인물들은 처음부터 여행자의 모습이 아닌 일상생활자의 모습에 익숙하다.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매 순간이 달랐다. 등장인물들의 표정과 대사, 그리고 사람들과의 친밀도까지.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게 변한다는 말처럼, 한 달 동안 손님 하나 없던 식당도 어느새 손님 가득한 식당으로 변했다.


4> 사람은 똑같다.

각자의 슬픔과 이유로 핀란드에 와서 카모메 식당으로 모여든다. 서로 다른 나이대의 일본인 여성들이 모이고, 현지 핀란드인들도 처음에는 경계하지만, 차츰 마음을 열고 식당을 찾는다. 곁에서 볼 때는, 여유롭고 평화로운 핀란드인도 보통의 인간인지라 슬픔과 외로움을 느끼고 위로받기를 원한다. 남편이 이유 없이 떠났다는 핀란드 여성은 식당 앞에서 화난 표정으로 한 동안 서 있더니 용기를 냈는지, 아님, 자기가 위로받을 수 있는 곳이라 확신했는지, 식당으로 들어와 술 한 잔도 채 마시지 못한 채 쓰러진다. 부축받고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처음 만난 마사코에 기대어 그간의 속마음을 꺼내놓고 위로받는다. 인간의 슬픔에는 언어도, 국가도, 나이도, 어떤 장벽도 없다는 것을, 그저 곁에서 조용히 들어줄 사람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재확인한 순간이었다.


5> 사람은 먹어야 살 수 있다.

주인공이 헬싱키에서 일본식 집밥인 주먹밥을 메인 메뉴로 한 건 어릴 적 기억 때문이었다. 평상시에는 어머니의 부재로 본인이 살림을 도맡아서 했기에 1년에 딱 두 번 소풍때와 운동회 때 아버지가 만들어준 주먹밥을 먹을 수 있었다고 했다. "주먹밥은 남이 만들어 준 것이 더 맛있대요"라는 말처럼, 정성을 다해 요리한 음식을 대접받는 느낌은 참 좋다. 주부가 돼서 나를 비롯한 엄마들이 하는 말이다. 남이 해 준 밥이 제일 맛있다고. 영화 중간에 나온 "죽을 때 하고 싶은 일에 맛있는 것을 먹고 죽겠다"는 대사도 있다. 먹는 것에 진심이다. 영화 끝자락에 식당에 몰래 물건을 챙기러 들어온 전 식당 주인을 잡고 나서도 주인공은 밥 먹자고 하면서 주먹밥을 쓱쓱 만들어 나눠 먹는다. 결국 먹는 게, 같이 앉아 음식을 나누는 게 행복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음식을 통해 정이 느껴진다.


주인공 음식을 조리하는 조리대에서 보면 식당 전체가 한눈에 다 들어온다. 엄마의 집밥처럼, 엄마 품처럼, 누구나 편하게 들려 배를 채우는 곳을 꿈꾸던 주인공의 꿈은 낯선 핀란드에서 이루어진다. 바쁘게 음식을 조리하다가 잠시 고개 들어 손님으로 가득 찬 식당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식탁에 앉아 잘 먹는 식구들을 바라보는 흐뭇한 엄마의 마음과 같아 보였다. 모든 게 잘 마무리된 뿌듯함. 대리만족을 느꼈다.


그러나, 현실에서 엄마인 나를 보니 엄마의 집밥도, 엄마의 마음도 생각보다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화 속 그녀는 한결같이 감정의 기복 없이 정성껏 음식을 준비해서 손님을 맞이한다. 돌아서면 배고프다는 아들의 식욕을 채울 수 있는 마법 같은 레시피와 체력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요즘이다. 반복되는 식사와 간식 챙기기에 지칠 때가 많아지는 요즘, 사치에처럼 기쁜 마음으로 조리대에 서고 싶다. 영화에서 보이는 그대로의 잔잔한 일상의 힘, 음식의 힘, 연대의 힘을 보면서 흐트러진 나를 위로했다.

'그래도, 내가 먹을 것을 해 먹여야지, 내 식당을 찾는 똑같은 손님들이 최소한 배는 채우고 가게 해야 하지 않겠어? 가끔 맛있는 것을 차려놓으면 나도 아이들도 기분 좋잖아. 그게 사는 거지, 엄마가 기분 좋게 해 줄 수 있는 일이잖아. '

현실에서 영화의 약발이 당분간 지속되기를 바라며 오늘도 식사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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