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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 팥죽

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54

by 태화강고래

겨울이면 엄마는 팥칼국수를 즐기셨다. 밀가루 반죽을 밀고 칼로 쓱쓱 썰어 진한 팥물에 넣고 끓이셨다. 손이 빨라 부엌에 서서 뚝딱뚝딱 만들어 식탁에 금세 올려놓는 듯했다. 엄마와 여동생은 한 자리에 앉아 두 그릇씩 금세 비웠지만, 나는 한 그릇 겨우 먹는 정도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밀가루 음식을 덜 좋아해서였다. 그때 맛있게 많이 먹어둘걸. 아니, 덜 먹어서 덜 그리운 게 나을 수도 있겠다.


벌써 13년이 흘러갔다. 엄마가 부엌에 서서 요리를 하지 못하고 지나간 시간들이. 어느 날 갑자기 혼자 집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골든 타임이 지나 병원에 도착했던 엄마는 이후 뇌병변장애인으로 살고 있다. 오른쪽 편마비라는 장애 때문에 겨우 왼손을 써서 어색한 손놀림으로 숟가락과 포크로 식사를 하는 정도이다. 가끔 "내 손으로 해 먹던 홍어무침이 먹고 싶어. 총각김치, 갓김치도 먹고 싶다."라고 속내를 털어놓을 때면 엄마도 듣는 나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제는 동지였다. 평상시에도 먹는 팥죽이지만, 병원에 있는 엄마는 동지라 더더욱 팥죽이 생각날 듯했다. 오래간만에 여동생이 먼저 팥죽을 시키라며 돈을 보냈다. 팥칼국수는 못 드시니 팥죽이라도 대접해드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는지. 배민 앱을 켜고 팥죽을 주문하려다 보니 포장 용기 선택이 되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죽집에 전화했다. 동지로 바빠 오늘만 반포장이 안되고 기본 포장용기로만 배달이 가능하다 했다. 보통 1인분을 반포장해 2개로 나누어주기 때문에 4인분을 주문하면 엄마는 같은 병실에 있는 환자분들과 나눠드신다. 공동간병실에 입원해 있기에 다 같이 나눠 먹어야 한다는 병실생활의 불문율을 지킨다. 같이 생활하는 환자들과 먹거리 문제로 아옹다옹 지내는 편치 않은 생활이라 간식거리를 사거나 주문할 때마다 조심스럽게 신경을 쓰는 게 다반사다.


일반 용기에 담긴 팥죽 4인분 배달이 왔다고 들었다. 평상시 반포장으로 된 팥죽은 나눠먹기도 편하고 양도 많았는데, 이번에는 용기를 덜 채운 죽 때문에 양이 부족했다는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환자들을 나눠주고 나니 간병사들은 못 먹어 미안했다, 떡으로 보충했다, 어떤 환자는 먹기 싫은 죽을 먹었는지 먹고 나서 속이 안 좋다고 투덜댔다, 라고 병실의 반응을 전하는 엄마의 말을 나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러고는 넉넉하게 주문하지 않은 내 잘못이라고 엄마를 달랬다. 자식들이 힘들게 번 돈으로 죽을 시켜서 남들과 나눠먹는데 고맙다는 말보다는 여기저기서 불평불만을 들으니 심기가 얼마나 불편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안 그래도 자식들에게 손 벌려 매번 얻어먹는 게 미안하다는 엄마인데, 넉넉하게 시키지 못한 내가 죄스러울 뿐이었다.


기분 좋게 따뜻한 팥죽 한 그릇을 대접하고 싶었는데, 그게 어려웠던 동지였다. 남들 다 챙기고 나서 정작 본인 입에 한 숟가락이라도 맘 편히 떠 넣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동지에나 먹는 동지 팥죽이 아닌 언제나 먹을 수 있는 동지 팥죽이 되었으니 조만간 다시 넉넉하게 시켜드려야겠다. 별 것도 아닌 일이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별스럽게 되니 보호자의 관심과 배려가 참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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