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56
아들의 초등학교 졸업이 다가온다. 지금은 개근상이 자취를 감췄지만, 한 때는 개근상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가끔씩 친구들과 모임을 할 때도 "난 6년 개근한 사람이야, 성실한 사람이라고!"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개근이 이제는 더 이상 자랑의 대상이 아닌 부끄러운 세상으로 변했다.
개근거지
이 말을 처음 듣고 충격받았다. 성실함과 빈곤함이 결합해서 뜻밖에도 부정적인 단어로 태어났다. 근면하고 성실해야 성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공식은 초등학생과 그 부모들 사이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개근거지는 2019년 말부터 맘카페 등에서 확산한 단어라고 한다. 교외 체험 학습으로 해외여행을 가지 못해서 학교를 결석하지 않는 형편이 어려운 아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잠시 주춤했던 이 말이 코로나 공포가 사라지면서 올해 초부터 해외여행이 재개되자 다시 등장했다고 한다.
우리 집 아이들도 체험학습을 안 썼으니 개근거지로 보인다. 슬픈 현실이다. 친구들이 해외 이곳저곳을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듣고 와서는 "우리 집도 해외여행 가면 좋겠는데. 우리는 언제 가요?"라고 물을 때면, 아이들에게 가끔은 미안하다. 미국이나 유럽같이 장거리 여행은 아니더라도, 올해 가까운 일본과 동남아 여행을 많이들 다녀왔다고. 일본정부관광국에 따르면 올 1~11월 한국인의 일본 방문객 수는 618만 명으로 전 세계 국가 중 1위였다. (서울 경제 https://www.sedaily.com/NewsView/29YNER86C4) 너도 나도 코로나로 답답했던 마음을 해외여행을 통해 해소하는 분위기다. 올해 하와이에 2주 동안 다녀온 지인도 4인가족이 3000만 원을 쓰고 왔다고 한다. 비싸긴 하나 아이들에게 추억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갈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했다. 이번 방학 때도 해외여행을 계획한 사람들이 주변에서 자랑을 일쌈는다. 아이들을 위해 프랑스에 간다는 사람, 이탈리아 간다는 사람, 베트남 휴양하러 간다는 사람. 방학중에 더 많은 친구들이 해외여행을 다녀올 것 같다. 해외여행을 가고 안 가는 건 개인의 선택이다. 그러나, 그런 선택의 결과가 빈부격차로 확대해석되는 게 문제다.
남편이 공공기관에 근무하고 부모 학력도 석박사 수준으로 중산층에 속하지만, 주변에서 우리 집이 제일 가난한 것처럼 보인다. 대출을 받아 소비를 하는지 여부는 물론 모른다. 그러나 빚내서 소비하지 않는 우리 집의 특성상 굳이 남들이 가니까 해외여행 한번 가보자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중형차 한 대 값을 기분내기 위해 무리해서 감히 쓰지 못한다. 우리 집도 자랑하며 해외여행을 다닐 여유가 있었다면, "개근거지"라는 말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았을까?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속담이 있다고 아이들에게 이야기한다. 우리 형편에 맞지 않게, 우리 분수에 맞지 않게 주변사람을 따라서 살 수는 없다고. 아빠 월급은 정해져 있고, 너희들 학원비와 생활비로 여유가 없다고 사실대로 이야기해 준다. 좀 여유가 생기면 가까운 곳에 한번 가보자고. 경제적 조건으로 남과 비교해서 우울해하지 말고, 내실을 키우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에게 더 큰 기회가 온다고 말해준다. 아이들에게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하는 말이다. 솔직히 가끔은 훌훌 날아다니며 SNS에 흔적을 남기는 타인의 삶이 부러울 때도 있으니까. 아이들의 다양한 경험을 학교 밖에서 자유롭게 허용하는 교육정책이 나쁘다고는 할 수 없으나 가정의 경제적 형편이 드러나고 그로 인해 비교하고 평가하는, 나아가 비하하는 신조어가 생기는 현실이 안타깝다.
개근상이 없다 해도 성실한 학교생활은 아이들의 성장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부모세대보다 풍족하게 자란 세대가 부모가 되어 남보다 부족함 없이 키우려는 욕심 때문에 아이들의 마음은 오히려 이기주의와 물질만능주의로 상처받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면 좋겠다. 남을 따라가고 과시하는 삶보다는 나를 채우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을 수 있지만,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질 수도 있다. 그만큼 말의 영향력이 크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어른으로서 말조심을 했으면 좋겠다. 어른을 통해 아이들은 배운다는 사실도 잊지 않았으면 한다. 학교에서 주는 개근상은 없지만, 아들에게 개근상을 주고 싶다. 성실하게 학교생활을 잘해줘서 고맙다고 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