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33
죽을 때까지 살피고 싶은 품 안의 자식일 뿐이다.
지난 주말 시댁에 들러 김장을 했다. 오후 4시쯤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 남편을 향해 시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신발끈이 너무 길어. 발에 걸려 넘어지겠다. 다시 묶고 가라."
80이 넘은 백발의 시아버지께서 흰머리가 점점 늘어나는 50이 넘은 남편에게 하신 말씀이다.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는데, 아버지의 눈에는 아들이 혹 넘어질까 염려되시는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한 말씀하셨다. 함께 나이를 먹고 있지만, 자식은 자식일 뿐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비슷한 장면이 재현되었다.
"신발끈 다시 묶어. 넘어질라."
이번에는 남편이 아들에게 한 말이다.
아버지의 불필요한 잔소리라고 느꼈을 남편도 자식 앞에서는 똑같은 부모였다. 부모의 잔소리가 듣기 싫었을 텐데 아들에서 부모로 입장이 바뀌자 무의식적으로 잔소리가 흘러나온다.
"공부해라, 길 건널 때 조심해라, 일찍 자라, 게임 적당히 해라."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매일 아이들과 기분 좋은 대화를 하는 시간보다 잔소리를 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진다.
쌍방향이 아닌 일방적인 혼자만의 말을 해 댄다. 마치 아이유의 <잔소리> 가사가 부모인 우리 마음을 대변해 주는 것처럼.
아이유의 <잔소리> 가사 중
하나부터 열까지 다 널 위한 소리
내 말 듣지 않는 너에게는 뻔한 잔소리
그만하자 그만하자
사랑하기만 해도 시간 없는데
머리 아닌 가슴으로 하는 이야기
네가 싫다 해도 안 할 수가 없는 이야기
그만하자 그만하자
너의 잔소리만 들려
잔소리의 뜻을 보면 (네이버 국어사전),
쓸데없이 자질구레한 말을 늘어놓음. 또는 그 말.
필요 이상으로 듣기 싫게 꾸짖거나 참견함. 또는 그런 말.
잔소리의 방언으로 잔말도 있다.
"잔"은 "자질구레한, 가늘고 작은"이란 뜻이다.
쓸데없이 덧붙인 말, 듣기 싫게 하는 말이라는 뉘앙스가 강하다. 하는 사람의 의도보다는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말의 뜻이 정해진 듯하다.
부모가 되어보니 왜 자식에게 잔소리를 하는지 그 마음을 여렴풋이 알겠다. 우리 부모의 영향은 아니다. 별로 잔소리 안 듣고 자랐으니까. 사업으로 바쁜 아빠의 잔소리는 가뭄에 콩 나듯이 들렸고, 말수가 적은 엄마는 잔소리도 드물었다. 지금이야 엄마도 나이가 들어 자연스럽게 아픈 나를 걱정하는 무한 반복되는 잔소리를 하는 정도이다. 내가 만난 시아버지는 잔소리가 많은 분이다. 남편말로는 퇴직 전에는 잔소리가 아닌 말씀 자체를 거의 안 하시는 분이셨다고 한다. 그런데 집에 계신 뒤로는 바뀌셨다고. 평생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지만, 그래도 채울 수 없던 부족함을 한탄하며 자식에게 잔소리를 하는 아버지로 바뀌었다고 했다. 더 나아가 대화상대가 점점 줄어드니, 사람이 그리워 반복되는 잔소리가 멈추질 않는다. 노인이 된 부모의 잔소리와 중년 부모의 잔소리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없다. 오래 산 부모나 적게 산 부모나 잔소리의 본질은 똑같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염려하는 마음, 나보다는 이생에서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게 도와주고 싶은 마음. 그뿐이다. 자식에게 그 마음은 부모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반복적인 피하고 싶은 말로 귀에 스쳐 지나가는 쓸데없는 말로 인식될 뿐이다. 그래서 시아버지를 뵐 때마다 남편에게 말한다. 그냥 앉아 들으라고, 그저, 앞에 앉은 자식 얼굴이 필요하다고.
부모는 부모다.
자식이 부모가 되어도 한번 자식은 영원한 자식일 뿐이다.
자식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의 잔소리는 쉽게 멈추지 않는다. 가끔은 잔소리도 기쁘게 들어드리자.
잔소리대신 행동으로,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바꾸려고 노력한다. 내 자식에게는 독이 되는 잔소리가 아닌 득이 되는 소리를, 사랑할 시간도 부족한 자식에게 들려주고 싶다. 부모와 자식사이에서 균형을 맞춰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