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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화강고래 May 01. 2024

롤러코스터 태운 4월아, 잘 가.

아침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129

나의 4월에게, 


너를 보내며 할 말이 있어. 잘 가라고.

1년 12달을 40년 넘게 살면서 올해 너는 어느 때보다 존재감이 두드러져 인사라도 하려고.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들어봤니? 


T.S 엘리엇의 황무지라는 시에서 시인은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상실과 절망 속에서의 희망을 노래했는데, 누구나 떠올리는 첫 구절이 있어. 바로, "4월은 잔인한 달"이야.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April is the cruellest month

봄비로 메마른 뿌리들을 부풀게 하고

욕망과 기억을 뒤섞어,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꽃피운다

우리의 겨울은 따스했었지...


나도 얼마 전까지 너를 그렇게 부르며 아픈 몸과 마음을 추스르려고 노력했어. 시의 해석과 상관없이 그저 내게는 문자 그대로 잔인하게 (cruel) 느껴진 시간이었으니까.  


너도 알다시피 내가 원해서, 내가 계획한 대로 15여 년 만에 하와이에 혼자 다녀왔잖아. 힐링의 시간을 보내며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만나게 해 주었던 그 시간들 말이야. 더없이 소중하고 귀한 시간이었어. 








good news or bad news?

"어떤 소식을 먼저 들을래?"라고 질문을 받는다면, 어떤 게 더 속편할까? 

보통 좋은 소식을 나중에 들으면서 먼저 들었던 나쁜 소식을 희석시킬 수도 있지. 그런데, 좋은 소식으로 흥분되었던 마음을 나쁜 소식이 기다렸다는 듯 찾아와 나를 바닥으로 떨어뜨렸어. 롤러코스터 같은 놀이기구는 멀리서 보기만 해도 가슴이 떨려. 하강할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에서부터 온전히 기계를 믿고 순간의 쾌감을 즐기는 놀이가 내게는 놀이가 아닌 고통처럼 느껴지니까. 그런 나에게 네가 특별히 롤러코스터를 태워 주웠지.

 



2달 전, 정기적으로 하던 대로 성형외과 진료를 갔다. 유방암 수술을 하고 재건수술을 하면 정기적으로 검진을 다닌다. 5년 무사통과의 날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는데, 그날따라 수술한 가슴에 깊이 박힌 딱지를 보던 담당의는 뜻밖의 말을 하며 청천벽력 같은 말로 놀라게 했다. 5년이 다 되어가는 데 피부가 너무 얇고 약해서, 지방이 없어서, 삽입한 보형물을 버티지 못하는 것 같다고. 별일 없이 부작용 없이 지내다가 뒤늦게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이런 경우는 굉장히 드문 경우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동안 항상 똑같은 곳에 있던 딱지가 그날에만 보였는지 딱지를 떼고 벌어진 틈을 그 자리에서 몇 바늘 꿰맸다. 감각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피부이며, 네 바늘이라 마취 없이 그냥 진행했다. 의사는 괜찮을 거라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생살을 꿰매는 고통이 온몸에서 모든 감각을 일깨운 듯 살아 움직여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그날부터 시술로 인한 통증이 시작되었다. 일상의 루틴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봉합된 부분이 다시 벌어질세라 조심조심 생활하며 근력운동마저 쉬는 날이 많아졌다.


하루하루 몸이 괜찮아지는 듯, 몸이 적응해 가는 듯, 나도 모르게 하와이 여행을 준비했다. 의사도 문제없다는 말로 나를 안심시켜 설레고 기쁜 마음으로 여행을 떠났다.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올까 싶어 걱정스러운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집을 나섰다. 그러나 하와이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가슴 통증이 다르게 느껴졌고, 여행 내내 마음을 졸였다. 뭐 큰일이야 있겠어라고 생각하다가도, 제발 별일 없기만을  매일밤 자기 전에 빌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병원진료를 앞당겨 갔다. 다행히 의사는 약간 부은 거 같으나 큰 문제는 없다고 안심시켰고, 약을 먹으며 호전되기를 기다렸다. 여행의 영향인지를 묻는 내 질문에 그건 아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겹쳐졌을 거다라며 직접적인 대답을 피했다. 딱 한 가지 원인이 되는 시작지점을 찾기 어렵고 어느 날 갑자기 눈앞에 벌어진 결과만 눈에 보이는 게 인생인가. 작은 것들이 모여 임계점을 넘는 순간 좋은 결과든 나쁜 결과든 눈에 보인다. 여행 때문인 거 같기도 했지만, 아니길 바랐다. 제발. 여행과 맞바꾼 고통으로 남기고 싶지 않았다. 여행으로 시작한 설렘과 흥분의 4월이라는 잠깐의 행복이 끝나고, 기다렸다는 듯이 나머지 화창한 봄날은 슬픔과 고통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암에 걸렸던 것처럼, 철저한 조사를 통해 원인을 밝혀내는 건 불가능하다.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는 것처럼, 혹시 그거 때문일까라는 생각만... 마음의 꺼림칙함만 남았다. 


결국, 피부가 버티지 못해 얼마 후 보형물을 제거하는 시술을 받았다. 인공적인 물질과 내 몸은 서로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고통스럽게 배웠다. 가슴성형도 흔한데, 암을 제거하고 할 수 없이 택한 재건수술도 힘들다니. 원래도 자연스러운 것을 좋아하고, 남들다 하는 필러든, 보톡스든, 시술이든 어떤 것도 하지 않는 나이기에 그냥 자연의 순리대로 살라는 것을 다시 가르쳐주는 것도 같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처럼 광고하고 행하지만, 실상은 못하고 맞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람이 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다시 시집갈 것도 아닌데. 그냥 살아."

"맘 조리고 사느니 그냥 살아."

"아픈 것보다 낫지."

"첨부터 뭐 하려 했어. "


등등... 친정엄마와 시어머니, 여동생과 시누이에게서 들은 이야기였다. 나 같아도 그렇게 말했을 거 같다. 딱히 경험해 본 적 없는 상황에 대해 위로해 줄 말이 없으니. 어떤 위로도 본인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런데 내 마음 역시 한마디말로 쉽게 정리해서 내뱄기는 어려운 심경이었다. 


그런데, 신기한 건, 하루하루 지나가면서 상처가 아물듯, 내 마음도 조금씩 평정심을 되찾아갔다. 


'어쩌겠어, 받아들이고 살아야지, 오히려 잘됐어, 보형물로 인해 다른 부작용이 생길까 봐 조바심 갖고 사느니 편히 살자'

등등으로 스스로를 돌보고 있었다. 아프지만 말자고. 


이렇게 또 난 넘어졌다가 다시 상처를 동여매고, 딱지를 남기며 일어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상처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기에 남은 평생을 마주해야 한다. 특히 암환자였고, 암경험자로 계속 살아간다는 주홍글씨를 내 가슴에 다시 한번 새겼다. 




너를 잔인하다고 기억하지 않을게. 대신 다른 말로 기억하려고 해. 인생을 가르쳐준, 생명력을 일깨워준? 잘 모르겠어. 지금은 그저 '롤러코스터 태워준' 친구로 기억할게. 




바다를 보고, 화산분화구를 보며 대자연 앞에 인간이라는 내 존재가 얼마나 작고 약한지를 깨달았던 순간을 기억하며 인간만의 놀라운 능력 덕분에 지금껏 살아남아 역사를 만들어가는 강한 인간이라는 존재라는 것도 잊지 않으려고 해. 좋은 순간, 힘든 순간이 섞이고 섞여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으니까. 삶의 자세에 따라 다채롭고 탄력적으로 성장하는 시간이 된다고들 하니 이 말을 믿고 다시 걸어볼게. 활동 중인 화산분화구의 경이로움과 활동이 멈춰진 그곳을 걷는 사람들을 지켜보던 나를 떠올리며 4월을 기억할게.


잘 가라. 4월아!








* 유방암 관련 소재는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라 쓸까말까 한동안 고민을 했습니다. 이런 경우도 있구나라는 정도로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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