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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화강고래 Jun 09. 2024

여름, 수박, 그리고 떠오르는 얼굴

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155

올해 첫 수박을 샀다. 남편의 손에 쥔 칼이 7kg짜리 수박을 자르는 순간 쩍~하며 벌어졌다. 생각보다 잘 익은 붉은 수박을 보자 입에 넣기도 전에 단맛이 느껴졌다. 


여름 과일하면 단연 수박이다. 작고 노란 참외와 경쟁을 벌일 만도 하지만, 내게는 수박이 일등이다. 수박과 아빠 얼굴이 만나는 순간이다. 사업상 아빠는 집에 일찍 들어오시는 날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가끔 집에서 저녁을 드실 때면 어김없이 수박을 찾으셨다. 어떻게 알고 엄마는 미리 사다 놓은 커다란 수박을 아빠 앞에 가져다 놓으셨다. 언제부턴지는 모르나 사과 한 조각도 깎지 않는 아빠가 매번 컷팅식은 주도하셨다. 무슨 대단한 행사라도 되는 것처럼, 아빠는 다른 식구들이 자르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수박을 자르는 칼은 아빠만 잡을 수 있었다. 식구들을 불러 모은 뒤, 둥근 쟁반 가운데 놓인 수박 앞에서 아빠는 의식을 행하는 제사장처럼 경건하게 자로 잰 듯 반듯반듯하게 자르셨다. 꼭짓점이 도드라진 이등변 삼각형 모양으로 자른 뒤 가장 씨가 없고 제일 새빨간 조각을 눈으로 골라 자식들에게 순서대로 하나씩 건네셨다. 우리 삼 남매는 서로 가장 뾰족한 수박을 먹겠다고 아빠 앞에서 재롱을 떨며 받아 들곤 했다. 흡족한 얼굴로 차례대로 나눠주고 나서야 수박 조각을 손에 드셨다. 늦게 귀가하신 밤에는 술기운에 벌건 얼굴을 한 채 랩에 쌓여 있던 수박을 손수 잘라 3-4조각으로 갈증을 해소하셨다. 10시가 넘은 밤에 술 냄새가 진동하는 아빠 옆에 바짝 앉지는 못하고 그저 소파에 앉아 아빠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빠는 초여름에 돌아가셨다. 수박을 참 좋아하셨던 아빠의 기일이 되면 어김없이 우리는 수박을 산다. 그리고 사진 속의 아빠에게 말을 건넨다. 


"아빠, 좋아하는 수박 여기 있어요. 많이 드세요!"


그렇게 한 해 두 해 산 수박이 어느새 올해로 12번째가 된다. 시원하고 달달한 수박을 함께 마주하고 먹는 대신 아빠는 아빠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먹고살고 있다. 돌아가신 후 한동안 커다란 수박 한 통을 내 손으로 자를 수 없었다. 시댁에서 깍두기 모양으로 썰어진 수박을 받아와 몇 조각만 먹으며 여름을 보냈다. 이제는 남편이 수박을 자른다. 아빠처럼 가장 먹음직스러운 조각을 골라 나에게 주진 않지만 그 해 첫 수박을 자르고 먹을 때면 아빠와의 추억을 한 번 떠올리고 시원한 수박을 맛있게 먹는다. 


한 때는 추억이 싫었던 적도 있었다. 생각나는 게 없으면 마음이 덜 아플 것 같았다. 시간이 약이라고, 이제는 달라졌다. 같은 하늘 아래서는 더 이상 만날 수 없지만 마음속에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추억 덕분에 아빠를 잠시 잠깐이라도 만날 수 있어 다행이다. 여름에는 보고 싶은 아빠를 자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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