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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화강고래 Jun 21. 2024

폭염 속에서 발견한 소소한 행복

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163

매달 관리비 명세서는 호통친다. 우리 집은 온수와 전기를 평균보다 많이 사용하는 세대라고, 그리고 나는 답한다. 줄여보겠노라고. 곧이어 말을 바꾼다. 그런데, 여름이라, 더군다나 35도가 넘는 폭염인데 어쩔 수 없을 것 같다고 미리 고개를 떨군다.


에어컨을 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하교 후 집으로 돌아올 때만 잠깐씩 틀고 주로 선풍기로 집안 온도를 낮춘다. 회사 다닐 때는 회사의 에어컨 신세를 맘 편하게 졌으나 주부가 돼서는 혼자서 에어컨을 켜기가 매번 망설여진다. 시원한 쇼핑몰이나 은행, 카페를 찾아다닐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올라온다. 이럴 때 답은 샤워. 체온을 낮춰준다. 


학창 시절부터 여름이면 샤워를 달고 살았다. 자기 전, 등교 전은 기본이고 외출 후 덥거나 집에 있어도 더우면 욕실로 갔다. 미지근한 온수가 끈적이는 몸을 타고 내려오면 순식간에 더위가 사라지는 그 잠깐의 상쾌함을 즐겼다. 물이 마르고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더워질게 뻔한데, 해도 안 해도 그만인 귀찮은 일을 왜 하냐고도 하지만 물이 살에 닿는 것과 안 닿은 것은 천지차이였다. 


결혼 후에도 남편은 자주 씻는 나를 보고 적당히 씻으라고 할 정도였다. 너무 자주 씻어서 아팠을지도 모른다는 어이없는 농담을 한 적도 있다. 본인에 비해 자주 씻으니 그럴 만도 했겠지만 후각까지 설레게 하는 바디제품까지 사용하는 동안 청량 지수는 만족지수로 나타났다. 여름철 샤워는 아이스크림보다 필수불가결한 존재였다.


아프면서 향이 강한 바디워시제품을 사용하는 대신 무향 또는 베이비용 같은 순한 제품을 쓴다. 물론 샴푸도 트리트먼트도 거의 향이 없는 제품을 사용하면서 화학성분과 거리가 멀어졌다. 순한 제품을 사용하면서 샤워시간이 줄어들고 자연스럽게 물 사용량도 줄었다. 그저 미지근한 물로 1분 샤워를 하는 것만으로 내 폭염지수는 급하강한다. 가만히 있어도 축축함이 느껴지는 무거운 시간들을 씻어내려 주는 듯해서 여전히 물샤워라도 즐긴다.


그런데, 요새는 마음껏 못했다.

성형외과 진료를 받는 가슴에 남은 시술 상처는 올해 안으로 회복될 수 있을지 의사도, 나도 모른다. 설상가상, 폭염까지 나를 짓누르고 있다. 지난주 진료 때에도,


"진물이 또 났네요. 음..."

"여름이라 땀이 많이 나서 더 늦게 나을 거 같아요. 제 눈에는 아직도 멀었던데요. 휴."

"아무래도. 이런 속도로 회복되는 듯싶더니 이렇게 되겠어요."


손으로 완만한 직선을 그리더니 더 눈에 안 띌 정도의 움직임만을 보여줬다. 그리고는 미안한 얼굴로.

"다음 주에는 전체 휴진이라 2주 후에 오세요."


의사파업으로 이번 주 휴진이 결정되고 나서 스스로 조심해야지라는 생각 때문에 몸과 마음이 무거웠다. 매주 진료 다니는 게 귀찮고 힘들어도 의사 앞에 상처를 보이며 체크라도 받았는데, 그나마 붙어있던 안도감마저 멀찌감치 나를 떠난 듯했다. 휴진이 계속될까 미리부터 걱정스러웠다. 원하는 대로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을 온몸으로 마음껏 맞을 수는 없었어도 상처부위를 피해 가며 고양이 세수 같은 날라리 샤워를 하며 지냈다. 주 3 일가는 운동도 산책도 조절했다.


그렇게 살다 보니 땀은 덜 났을지 모르나 몸과 마음은 무거웠다. 스트레칭을 했어도 혼자 하니 대충 하기가 일쑤였다. 오늘은 마음을 바꿔봤다.


'움추러들지 말자. 매일 하는 근력 운동도 아닌데, 한번 가서 땀 흘리고 시원하게 씻어도 돼.'


피하지 않고 했다. 작년 초, 처음 어설픈 몸짓을 했던 때처럼 부지런히 했다. 그간의 운동센터에서 있었던 시기, 질투, 불편함 등등을 잊고 내 동작에만 신경 썼다. 남들 신경 안 쓰고, 할 수 있는 동작만 따라 하고, 내 속도에 맞춰 50분을 당당하게 즐겼다. 잘하는 사람도, 강사의 시선도, 오늘은 내 눈과 머릿속에서 지웠다. 몸이 가볍고 정신이 맑아졌다. 50 분했을 뿐인데. 처음 운동하면서 즐거워했던 그 느낌이 돌아왔다. 잠깐 땀을 흘린다고 오늘 나을 상처가 내일 나을 것도 아닌데라는, 마음을 내려놓는 결정을 한 순간 몸과 함께 마음도 가벼워졌다. 기분 좋은 땀냄새를 맡고, 축축한 옷이 살에 닿아도 가볍게 집으로 와서 샤워기를 들었다.


"아..... 좋다!"


미지근한 물 한잔으로 목을 축이고, 선풍기바람을 등으로 맞으며 자판을 두드렸다. 폭염 속 신기루 같은 행복이 찾아왔다.


선택지가 좁혀지는 상황에 살게 되면 작은 것에도 감동하고 감사하게 되는 삶을 산다. 내가 그렇다. 얼음장 같은 에어컨도 깐이면 추워지니 샤워 후 선풍기 바람이면 됐다. 만족스럽다. 내일은 또 다른 마음이 날 찾아와 괴롭히더라도 지금 이 순간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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