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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화강고래 Sep 29. 2024

김밥에게, 고맙다

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218

가을소풍에 딸아이는 들떠있었다.

학교소풍도 좋은데 이보다 더 좋은 절친들과의 소풍이었다. 한 달 전부터 들먹이던 에버랜드 소풍날이 되었다. 친구들과 톡을 주고받으며 키득키득거리는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어느새 저만큼이라도 커버렸는지 세월의 힘이 느껴졌다. 에버랜드 식당에서 점심을 사 먹을 줄 알았다. 


"엄마, 소풍엔 김밥이죠! 식당은 비싸고 맛이 없어요. 싸갈래요."

"몇 시에 출발하는데?"

"8시 40분요."

"날이 아직 더운데, 알았어. 작은 젤아이스팩이라도 넣어줄 테니 가능한 한 빨리 먹고 놀아."


아침부터 김밥말 생각에 '나 귀찮아' 신이 잠깐 찾아왔다.

'그냥 사 먹지. 날도 더운데 상하기라도 하면 어쩌라고.'

빤히 눈빛으로 주문하는 딸을 보고 1초도 안돼 곧장 마음을 바꿨다.


가을. 소풍. 친구들

이렇게 좋은 조합에 도란도란 웃고 떠들며 김밥 먹는 것도 한때인데. 그것도 인생 처음 친구들과 가는 소풍인데, 작은 독립을 시작한 아이에게 엄마가 싸줘야지. 모든 게 때가 있듯, 가족 말고 점차 다른 집단과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에 서서히 진입한 것을 보니 고마웠다. 보통 5학년 때쯤 친구들끼리 롯데월드나 에버랜드에 놀러 가기 시작한다고 하더니 그 나이가 되었다. 아들은 친구들과 밖에서 어울리는 것을 그다지 즐기지 않지만 딸은 꽤 사교적이다. 함께 가는 친구들 5명 가운데 자기가 분위기 메이커라고 자랑까지 하고 나섰다. 하루종일 놀 계획을 자기들끼리 짜고 저녁까지 먹고 들어온다고 얘기하고 나갔다. 다 컸다. 


평상시에도 먹는데 더구나 소풍같은 행사에 빠지면 왠지 서운한 그 친구, 김밥을 말았다. 재료 준비과정이 약간 번거롭지 완성된 김밥산을 마주하면 괜시리 뿌듯하다. 요리에는 남다르게 자신이 없는데 그나마 김밥이라도 잘할 수 있어 다행이다. 다른 음식에 비해 맛없을 걱정이 덜하니까. 6시 30분 취사예약 덕분에 고슬고슬, 부들부들 윤기 나게 완성된 밥이 오늘따라 잘 됐다. 전날 늦게 자서 졸리는 건 어쩔 수 없지곧 몰입의 순간이 왔다. 참기름과 소금으로 간하고 식히는 동안, 끓는 물에 햄을 담갔다가 다시 프라이팬에 살짝 굽고 계란물을 풀어 지단을 만들었다. 우엉, 오이, 단무지를 넣어달라 했다. 재료는 주문에 따라 매번 바뀌지만 계란과 햄은 고정이다. 김과 밥이 하나게 되게 잘 펴고 계란, 햄, 치즈, 우엉, 오이, 단무지를 넣어 꾹꾹 눌러 말았다. 주황색 당근과 초록색 시금치가 없으니 가을색처럼 전체적으로 노란 김밥이 완성되었다. 수분이 많은 오이와 단무지가 들어갔으니 목이 메일 걱정 없이 전체적으로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취향에 따라 다양한 재료를 넣고 김에 돌돌 말아먹는 김밥은 한입에 쏙 들어가는 재료각각의 맛이 오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샐러드 접시에 담긴 양상추, 파프리카, 브로콜리, 견과류 등의 식재료가 본연의 맛을 조화롭게풍기듯, 건강한 맛이 눈에 보인다. 만드는 사람입장에서는 시간과 땀이 담긴 슬로 푸드지만, 먹는 사람 입장에서는 건강한 패스트푸드라 좋다.  


주말아침 혼자 조용히 김밥을 말며 평화로웠다. 팔은 아파도 머리는 안 아팠다.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이 사라지고 차분해졌다. 김밥 명상을 했다. 다른 때와 달리 김밥에게 고마웠다. 

'잘 어우러진 김밥 속 재료처럼 여러 상황 속에서도 나라는 존재는 잊고 살지 말자.'

김밥과 독대를 마치고, 도시락통 뚜껑을 닫았다. 


딸의 첫 가을 추억 만들기에 보탬이 되어 좋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재료준비와 뒷정리는 엄마의 몫이었지만 대신 엄마는,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을 덤으로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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