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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많이 했어

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281

by 태화강고래

작년 설, 어머니는 밥이 부족해 사위 앞에서 얼굴을 못 들고 자책만 하셨다. 설 명절이 다가오자 어느새 내 기억 속에서 슬그머니 그 얼굴이 보였다. 시누이네가 점심을 먹고 간 이후에도 내내 마음에 걸리셨는지 저녁밥상 앞에서도 한숨을 쉬시며 밥 이야기를 하실 정도로 그날은 어머니에게 운수 나쁜 날이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날이셨던 것 같다.


1년 후 우리는 다시 만났다. 시누이네 식구와 우리 식구가 들어서니 한적한 집이 가득 찬 느낌이었다. 점심상 차리느라 여자 셋은 바삐 움직였다. 어머니는 총괄, 시누이는 갈비찜을 하고 나는 어머니를 도와 떡국을 끓였다. 작년처럼 올해도 떡국을 안 먹는 외손자를 위해 밥과 소고기 뭇국을 따로 준비하셨고 4인분 정도의 떡국도 준비하셨다. 고사리나물, 더덕무침, 도토리묵, 갈비찜, 김치를 상에 놓고 압력밥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새하얀 쌀밥을 퍼 담았다.


"밥을 평상시보다 많이 하느라 물 계량을 제대로 못해 밥이 질어. 많이 했으니 많이 먹어들."


작년의 뼈아픈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실천으로 옮기신 듯, 눈앞에 밥이 가득했다. 반들반들 윤기 있는 부드러운 밥. 평상시에는 잡곡밥을 드시지만 가족이 모이면 쌀밥을 하셨다. 진 밥이 오히려 더 좋았다. 작년보다 넉넉하게 했는데, 올해는 "밥 더 주세요!"를 외치는 손자들이 없었다.


"더 먹어. 더 안 먹어들?"

재차 물어보셨으나 기다리는 대답은 어디서도 없었다. 떡국팀도 밥팀도 별말 없이 각자 자기 밥그릇을 비우는데 열중했다. 어머니의 곤두선 신경을 크게 거스르는 일 하나 없이 순조롭게 식사시간이 지나갔다.


시누이네가 먼저 가고 설거지와 뒷정리를 마치자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밥이 많이 남았네. 저녁까지 먹고도 남겠어. 작년에 밥이 부족해 얼마나 쩔쩔맸던지. 부족하느니 남는 게 훨씬 낫지. 저녁 먹고 가."


흔히들 밥심으로 산다고 한다. 그리 많지도 않은 10명이 모인 자리. 먹거리가 풍성한 명절이라는데 솜씨 없는 엄마가 해 준 밥이라도 양껏 먹고 가면 속이 편안하실 텐데. 그 소박하고 다정한 바람이 올해는 제대로 이뤄진 걸까 살짝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얼굴색 변할 일 없이 지나갔으니 됐다 싶었다. 작년 기억이 깨끗하게 지워지지는 않겠지만 매년 다가오는 명절마다 너무 신경 쓰지 않고 차차 털어버리셨으면 좋겠다. 손님 접대가 아닌 가족과 함께 하는 설인만큼 부담감을 약간이라도 내려놓으시면 좋겠지만 쉽지 않을 것 같다. 배를 두둑하게 채워주고 싶은 엄마라는 자리에 있는 동안은 어쩌면 운명처럼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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