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309
"네가 어느새?"
어떤 기억은 힘이 세서 오래도록 살아남는다. 좀 채 사라지지 않는 것 같다. 10분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살면서 태어난 순간부터 성장을 지켜본 아이가 있다. 촌수로는 5촌이지만 이웃사촌보다도, 어느 친척보다도 가깝게 지냈다. 큰 외삼촌네 큰 아들의 아들. 엄마는 고모할머니, 나는 고모이다. 서울 사는 고모네 집이라고 지방에 살던 외가식구들은 우리 집에 자주 들렀고 덕분에 늘 북적거렸다. 아빠의 두둑한 지갑과 엄마의 큰 손 덕분에 엄마 밥을 안 먹고 지나친 친척들이 없을 정도였다.
특히 그 아이네 집과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면서 특별히 더 살갑고 다정하게 지냈다. 같이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내 나이 9살에 그 아이 엄마는 시집을 왔고 2년 터울로 딸 둘에 아들 하나를 낳았다. 우리 집 삼 남매처럼 그 집도 아들이 막내인 삼 남매를 두었다. 시고모지만, 나이 차이가 별로 안 났던 터라 우리 엄마를 언니처럼 의지하며 살았다.
"엄마한테 혼나서 가방 들고 할머니 집에 갔었는데. 울기도 참 많이 울었어. 내 성격이 유별났잖아."
본인도 기억하고, 우리 엄마도 기억하는 칭얼대고 개구쟁이였던 그 꼬마가 서른이 훌쩍 넘더니 결혼한다고 신붓감을 인사시키러 왔다. 토요일 오후, 화창한 날씨만큼 반가운 손님들이 엄마가 계시는 병원으로 왔다. 어느새 그 집안 전통이 된 듯 결혼 날짜를 잡으면 당연히 엄마를 찾아온다. 10여 년 전쯤 큰 딸이 시작해 둘째 딸이 그랬고 마지막으로 아들이 직접 왔다. 삼 남매가 짝을 지어 나란히 서서 휠체어에 앉아 계신 엄마께 인사를 드렸다. 어느새 닮아버렸는지 곁에서 수줍게 인사하는 신부의 인상이 신랑과 비슷해 남매 같았다. 성실하고 수수한 집안의 며느리감답게 역시나 그런 분위기를 풍겼다. 옆에서 알뜰하고 싹싹하다는 칭찬도 곁들였다. 낯선 사람들과 함께 있기에 불편할 텐데 내색 없이 거의 한 시간을 함께 앉아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싱글 생글 잘 웃는 모습에 몇 마디 안 해봤어도 모두를 편하게 만들었다.
풋풋한 설렘이 가득한 봄에 전해진 깜짝 결혼 소식이었다. 세월이 흘러 비록 엄마는 쇠약해졌지만 엄마가 뿌린 정이라는 씨앗은 여전히 그들의 가슴속에서 봄볕을 받으며 따스하게 잘 자라고 있었다.
"자주 못 찾아봬서 죄송해요. 다음에 또 올게요."
각자 사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자식도 부모를 자주 찾아보지 않는데, 이런 말을 가식 없이 하는 게 고맙고 대견했다. 그때는 건강하고 돈을 쓸 수 있어 베푸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며 사셨던 엄마는 속내를 털어놓으셨다. 다 지난 옛날이지, 이제는 더 이상 해 줄 게 없어 미안하다고. 찾아오는 친척들을 마주할 때면 고마우면서도 움추러드신다. 세월 앞에서 약하디 약한 존재가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러나 사랑은 남는 것>이라는 책이 갑자기 떠올랐다. 사랑을 주제로 한 수많은 책 중에 유독 그 제목이 떠올랐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고 장영희 교수가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을 힘겹게 받아들인 후 10주기 추모 기념으로 책을 출판하며 서문에 남긴 글이다.
"누구나 결국 이 세상을 떠나게 마련이지만 '그러나 사랑은 남는 것'이라는 걸 믿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는 것 같아 외롭지 않고 마음 든든하다. (15쪽)"
어떤 고통과 슬픔에도 불구하고 추억은 남아 사랑으로 영원히 남는다는 것을 본인의 경험을 통해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 이제는 추억 속 교수님의 사랑법이 새삼스럽게 나를 잠시 멈추게 했다. 진짜 할머니가 된 엄마가 앞으로 세상을 떠나셔도 자식뿐만 아니라 엄마의 마음과 손길이 뻗었던 모두의 마음에 영원히 살아계실 것 같아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