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부부의 깨소금 만들기 현장

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312

by 태화강고래

어버이날이 다가와 겸사겸사 시댁에 다녀왔다. 바깥 음식을 별로 안 좋아하셔서 장을 봐서 갔다. 값비싼 한우 등심을 꺼내 굽고 오징어를 데쳐 새콤 매콤한 오이 오징어초무침을 했다. 콩시루떡 같은 콩밥과 총각김치를 놓고 상에 둘러앉아 소박한 식사를 마쳤다.


며칠 전 깨소금이 똑 떨어졌다. 부끄럽게도 지금껏 어머니가 볶아주신 깨소금을 받아먹기만 했다. 올 때마다 알아서 챙겨주시니 그저 감사히 받기만 했다. 이번에는 스스로 해결해 볼까 하다가 용기(?)를 내서 설거지를 하며 슬쩍 말씀드렸다. 말이 떨어지자 무섭게 볶아놓은 것이 없으니 바로 볶으면 된다고 참깨를 내오셨다. 어머니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물에 드르륵 씻으신 뒤 체망에 물이 빠지게 넣어둔 참깨를 볶음팬에 담으셨다.


옆에서 얼정거리던 남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럴 때 보면 나도 나이가 들어 넉살 좋은, 아니 뻔뻔한 며느리로 변한 것 같다. 어머니가 일은 1도 안 시키고 키운 아들을 기회만 되면 부엌일에, 그것도 시댁에서 거들게 하고 있다. 어머니 눈앞에서 내 아들도 아닌 어머니 아들을 시키는 대담함에 스스로 놀란다. 깨소금 만드는 작업은 난생처음 해 보는 일이라는 게 분명한데,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실지 내색하지 않으시니 잘 모르겠다. 벌어진 일이니 어쩔 수 없었다.


갑자기 깨 볶는 남자가 된 남편...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깨를 이렇게 볶는 거구나. 깨는 언제 먹는데?"

"제육볶음에도 뿌리고, 나물무침에도 뿌리고... 음식 마지막에 뿌리면 보기도 좋고 맛도 고소해져."

"이렇게 볶아야지!"


중간중간 어머니의 점검이 이어졌고, 남편은 멍하니 깨를 볶았다. 그렇게 10여분을 볶은 뒤 통통하게 볶아진 깨를 잠시 식혔다. 그사이 절구를 가져오신 어머니는 남편에게 시범을 보이셨다. 오랜만에 본 절구였다. 결혼 전 엄마가 마늘을 빻고 깨소금을 만드시던 절구가 생각나 속없이 반갑기도 했다. 주부지만 불량주부인 나는 집에서 절구를 안 쓰니 남편은 처음으로 절구와 절구통 구경을 한 셈이었다.


KakaoTalk_20250506_212655545.jpg


남편이 절구질을 하는 동안 설거지를 마친 나는 남은 깨를 볶기 시작했다. 요리와 살림에 진심인 주부가 된 냥 왼팔, 오른팔 바꿔가면서 이리저리 볶았다. 남편과 나는 처음으로 어머니 손을 빌리지 않고 집에 가져갈 깨소금 만드는 작업을 했다. 볶아진 깨를 절구통에 넣어 곱게 빻는 작업까지 순조롭게 마무리했다.


철없는 딸에서, 속없는 며느리로 살았지만, 이제는 조금씩 조금씩 바뀌어야 한다는 걸 안다. "깨소금 주세요."라는 말 때문에 점심 식사가 끝나자마자 우리 부부는 정신없이 깨를 볶으며 어머니의 사랑과 노고에 감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덕분에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은 천연 방향제를 걸어놓은 듯 고소한 깨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참 고소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그 맛이 아니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