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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쓸한 어떤 날

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333

by 태화강고래

일상을 살아간다. 지겨울 때도 설렐 때도, 슬플 때도 기쁠 때도. 매일 밤 자고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1998년 개봉한 트루먼쇼의 트루먼이 된 듯하다. 그러나 어제와 다른 오늘이 시작된다. 얼마만큼씩 늙어가고 있는지 실감하기 어렵지만 하루가 지나는 만큼 세포는 더 늙었을 것이다. 그 흔한 말처럼 오늘이 남은 인생의 가장 젊은 날로 살아야 한다. 작년과 올해가 다르고, 올해와 내년이 다르겠지만 요새 들어 늙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찾아온다. 나이 들면 다 그렇지라고 감정을 배제하고 담담하게 이야기하기가 조금씩 조심스러워진다.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가 되어가니 서글프기 시작했다. 나름 저속노화 생활습관을 유지하고 있다고 자부했는데, 혼자만의 착각이었을까.


녹내장 검진을 다녀왔다. 6개월에 한 번씩 녹내장 진행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시야검사와 녹내장단층촬영을 한다. 좌우 한쪽씩 10분 정도 소요되는 시야검사는 턱을 대고 이마를 붙인 불편한 자세로 동서남북 어디서 나올지 모르는 불빛에 순간적으로 반응하는 검사이다. 마치 즉석 퀴즈에 답을 맞혀야 하는 것처럼 매번 할 때마다 여간 부담스럽다. 이에 비해 단층촬영은 화면상의 파란 불빛을 따라 눈만 뜨고 있으면 되니 부담이 없다. 안압까지 측정하고 진료실에서 검사결과를 들었다. 다행히 녹내장은 악화되지 않고 6개월 전과 같은 상태라 했다. 내년 초에 다시 오라는 말과 함께 의사의 짧은 진료가 끝났다.


잠시 눈치를 보다 눈이 침침하다고, 당연히 노안일 거라 생각하고 물었다. 뜻밖에 이어진 대답은 "이미 백내장이 시작되었어요."였다. 그녀의 무미건조한 말에 약간 당황스러웠다. 녹내장을 처음 진단받았을 때의 절망과 슬픔은 없었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질환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지금은 초기인데 나중에 봐서 수술하면 오히려 고도근시가 좋아지기도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녹내장 검진을 하면서 백내장도 같이 보고 있다는 말을 했다. 그럼 왜 진작하지 않았을까? 내가 먼저 꺼내지 않았다면 언제쯤 백내장은 알게 되었을까? 따질 수도, 길게 물어볼 수도 없는 적막한 진료실에서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집으로 오는 지하철에서 따져보니 녹내장을 진단받은 지 3년 만에 백내장까지 선물 받았다. 녹내장 백내장 세트라니. 40세 이상부터는 안질환 발병률이 높다는 통계치에 딱 걸린 두 눈이 애처로웠다. 질병에 있어서는 또래집단에서 자꾸 앞서가는 느낌이라 서글픈 생각마저 들었다. 50세를 눈앞에 둔 중년이라 주변인들처럼 단순한 노안일 줄 알았는데 내 맘대로의 진단이었다. 60-70대에 발병률이 높아 대표적인 노인 안질환으로 알려져 있는데 나는 뭐지 싶었다. 스마트폰과 노트북 같은 전자기기의 사용 증가로 40대 환자들도 증가 추세라 하지만 내 눈이 그렇게도 혹사를 당하고 있었는지 의구심마저 들었다. 아이들보다 스마트폰을 적게 본다고 항변이라도 하고 싶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해 줄 말이 하나 더 늘었다. 노안이라 단정 짓지 말고 안과 검진을 가라고. 노안과 백내장은 발병시기와 초기 증상이 비슷해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가까운 글씨나 사물을 볼 때 초점이 안 맞는 정도의 증상을 보이는 노안과 백내장은 확실히 다르다. 백내장은 보는 거리와 상관없이 안개 낀 것처럼 뿌옇고 침침하며 눈부심과 겹쳐 보임이 있다고 한다. 정기검진을 다니는 덕분에 백내장도 알게 되었으니 긍정적인 마음으로 다행이라고 에둘러 포장해보려고 한다. 진짜, 노화는 숨 쉬는 동안 계속 진행되고 있다. 의식하든 안 하든 앞으로 향해 걸어간다. 붙잡고 싶지만 붙잡을 수가 없다. 이럴 때일수록 중요한 게 무엇인지 우선순위를 매겨가면서 남은 생을 담담하게 살아갈 용기와 인내의 싹을 키우라는 교훈을 주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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