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22
찬바람에 무채색 하늘만 보이는 초겨울이다. 몸도 마음도 계절의 영향으로 움츠러든다.
5교시 수업을 마치고 하교 후 식탁에 앉아 간식을 기다리는 딸과 겨울 하면 생각나는 것을 이야기했다.
핫초코, 군고구마, 붕어빵, 호떡, 군밤... 추운 손과 입을 따뜻하게 녹여줄 만한 겨울철 대표 간식이 당연히 줄줄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핫초코 마실래?
네!
오늘은 내가 엄마한테 핫초코 만들어 드릴게요.
그래!
말이 떨어지자마자 미소 가득한 딸아이의 말에 나는 흔쾌히 yes를 외쳤다.
설탕이 들어간 음식은 거의 먹지 않는 나였지만, 날이 춥기도 하고, 딸이 만들어준다고 하기에 기분 좋게 기다렸다. 핫초코 가루를 머그잔에 조심스럽게 털어 넣고, 무선 주전자에 담긴 뜨거운 물을 천천히 붓고, 우유를 살짝 넣었다. 정성을 들여 살살 젓더니 나에게 내밀었다.
달달하고 따뜻해서 맛있어!
덕분에 기분까지 좋아!
엄마, 오늘 핫초코는 참 맛있어요.
제가 만들어서 더 맛있죠?
별거 아닌 핫초코 한잔을 호호 불며 마시면서 딸과 웃었다.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오자 서둘러 물었다.
오빠, 내가 핫초코 잘 만드는데, 마실래?
딸은 최고의 바리스타가 된 양 아까보다는 좀 더 자연스러운 손놀림으로 핫초코 한잔을 후딱 만들어 앞에 내놓는다.
진짜 별거 아닌데... 셋이 마음이 따뜻해졌다.
가끔 핫초코를 마실 때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마셨던 핫초코가 생각난다. 2000년 학교를 휴학하고 떠난 어학연수중에 주말을 이용해 친구와 동부 도시들을 여행했다. 필라델피아에 11월 이때쯤 방문했다. 필라델피아는 뉴욕시 다음으로 북동부에서 큰 도시로, 박애의 도시, 미 건국초기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보존되는 역사적 도시로 유명하다. 톰헹크스 주연의 "필라델피아"란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법정 영화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가봐야 하는 코스였다. 회색빛으로 둘러싸인 구시가지에 위치한 인디펜던스홀, 국회의사당을 멀리서 보고, 깨진 자유의 종도 눈으로 직접 봤다. 기념품으로 독립선언서와 미니어처 자유의 종도 샀던 걸로 기억한다. 200여 년이라는 짧은 역사를 가진 나라답게 그냥 지나칠만한 소소한 것까지 다 의미를 부여해 놓은 것을 보고 '포장이 지나치네'라는 생각에 웃음이 나기도 했고 '뭐라도 소중히 여기는 태도가 본받을 만하구나'는 존경심도 살짝 생겼다. 쌀쌀하고 스산한 날씨에도 흐르는 시간을 붙잡아 많은 것을 보고 싶은 마음에 청춘의 우리는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여기저기 다녔다. 지쳐 발걸음이 느려졌을 때 눈앞에 가게가 보였고, 우리는 거기로 달려 들어갔다. 다른 메뉴는 생각나지 않았고 지금도 그저 핫초코만 기억난다. 부드럽게 목을 타고 내려가는 그때의 달콤함은 이후로 어디서도 맛보지 못했다. 낯선 도시에서 외국인이 느낀 추위와 피로를 핫초코는 따뜻하게 보듬어 녹여서 앞으로 나아갈 에너지로 바꿔주었다.
딸이 타 준 핫초코 덕분에 잠깐 그 시절의 내가 생각났다. 그때 함께 했던 친구는 지금도 잘 지내고 있겠지. 궁금하다. 필라델피아 방문 이후 20번이 넘는 겨울을 맞으며 핫초코를 마실 때마다 젊은 날의 추억이 떠오른다. 그동안 세상을 누비고 다니며 큰 꿈을 펼칠 수 있을 것 같던 포부는 살면서 점차 사라졌고, 평범한 일상에서 희로애락을 느끼는 엄마가 되었다. 혼자가 아닌 딸과 아들과 함께 핫초코 추억을 하나 더 만들며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산다. 머지않아 오늘이 추억의 이야기소재로 등장할 것도 같다.
겨울철 따뜻함의 대명사인 핫초코는 과거와 현재의 열정과 사랑을 담은 추억의 달콤한 맛이다. 그래서 커피 애호가지만, 가끔은 핫초코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