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다는 건

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23

by 태화강고래


하루에도 몇 번씩 알림이 울릴 때마다 브런치에 들락날락거리며 글쓰기 수업 중이다.

다양한 주제 가운데 브런치 작가님들의 글쓰기에 대한 솔직한 고백을 읽을 때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로 공감과 위안을 삼는다. 뼈 때리는 듯한 날카로운 조언을 담은 글이 눈에 들어오면 '정신 차려. 초심을 잃지 말고, 꾸준히 해보자.'로 나를 다시 반성과 깨달음으로 무장시킨다.


처음, 내 이야기를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암을 경험하고 나서다. 내 손톱밑의 가시가 남의 고뿔보다 더 아프다는 속담처럼 몸소 겪고 나서야 그동안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던 암에 관한 이야기가 마치 내 이야기나 된 듯 나를 끌어당겼다. 암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사방에 널려 있었다. 대학교수, 의사, 과학자, 시인 등이 쓴 투병기나 유작은 도서관에도 서점에도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 그저 저자의 사회적 위치와 암의 위중함에 따른 반향의 차이가 있을 뿐 인간으로서 깨닫는 유한함은 같았다. 유명인이 아니고 평범한 소시민이니까, 언감생심 출판 목적보다는 그저 내 이야기를 남기고 싶어졌다. 평범한 일상 속에 묻혀 하루하루 관성에 젖은 삶을 살아갈까 봐, 글쓰기를 삶의 원동력으로 삼아 일상을 알차게 살기 위해 쓸 용기가 났다. 내가 쓰는 이유이다. 왜 쓰는가에 대한 답은 작가마다 다를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이 때로는 고통스러운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며 유일한 능력이 될 때, 나 같은 독자에게 글쓰기의 힘과 영향력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압도적이다.


브런치 작가에 도전하기 전에 읽었던 "숨결이 바람이 될 때 (When Breath Becomes Air)"가 바로 그런 이유로 쓰인 책 같았다. 인간의 유한한 삶과 죽음, 그리고 현재와 미래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가끔 펼쳐보는 책이다. 성공의 길을 달리던 신경외과 의사인 폴 칼라니티가 쓴 자서전이다. 승승장구하던 의사. 36세의 젊은 나이로 폐암말기 판정을 받고 의사로서 환자를 돌보던 입장에서 환자가 된 자신의 모습을 맞닥뜨리면서 환자와 의사의 경계는 사라진다. 의사가 아닌 환자로, 주체가 아닌 객체로,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기까지의 심리적 고통을 가감 없이 솔직히 드러냈다.


예전에 내가 맡았던 환자들처럼 나는 죽음과 마주한 채 내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했다... 나는 의사와 환자 사이에서 입장이 갈린 채, 의학을 계속 파고들지 아니면 문학에서 답을 찾아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죽음과 마주하며 나는 예전의 삶을 복원하기 위해서, 아니면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서 부단히 버둥거렸다.(88)


... 내가 외과의사로서 얼마나 오만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최대한의 책임감과 권한으로 환자를 돌보려 했지만 그것은 기껏해야 일시적인 책임과 덧없는 권한이었다. 위기의 순간을 무사히 넘기면, 환자는 깨어나 몸에 삽입했던 관을 제거하고 퇴원한다. 이렇게 병원을 떠난 환자와 가족은 계속 일상을 살아가겠지만 결코 예전과 같지 않다. 신경외과 의사의 메스가 뇌질환을 해결하듯이, 의사의 말은 환자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감정적이든 육체적이든 불확실성과 병적상태는 환자 본인이 계속 씨름해야 할 문제로 남는다. 에마는 나의 옛 정체성을 되돌려주지 않았다. 대신에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는 내 능력을 지켜주었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정체성이 필요하리라는 것을 마침내 깨달았다. (102)


인생의 20년은 의사와 과학자로, 나머지 20년은 작가로 살겠다던 계획을 앞당겨 작가가 되었다는 그의 말처럼, 글 쓰는 작가가 된 건 그의 마지막 선택적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언어로 묘사할 수 없을 만큼의 절망과 슬픔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글을 쓰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기 위해 얼마 남지 않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냈다. 말기암 환자로서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며 그저 하루하루 버티기도 힘들었을 텐데 작가는 그 시간마저도 그냥 흘러 보낼 사람이 아니었다. 성공의 가도를 달렸던 그의 타고난 성격대로 죽는 날까지 글을 쓰면서 남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결국 책을 썼다.

... 암 환자들의 회고록 등 죽음에 관한 글이라면 뭐든 읽었다. 죽음을 이해하고 나 자신을 정의하고 다시 전진하는 방법을 찾는데 도움이 될 어휘를 찾고 싶었다. 직접체험이라는 특별한 경험을 하면서 문학작품이나 학술적인 연구에서 멀어지긴 했지만 내 경험을 언어로 옮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밍웨이 역시 비슷한 형태의 저술 과정을 설명한 바 있다. 풍부한 경험을 하고 충분히 사색한 뒤 글을 쓰는 것 말이다. 내게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글들이 필요했다. (9)


글을 썼기에 그의 마지막 삶이 안타까운 한 개인의 삶에 그치지 않고 보편적인 인간의 삶으로 확대되어 나를 포함한 독자들에게 감동과 가르침을 주었다.


글을 쓴다는 것을 주제로 다소 무겁게 글을 써봤다. 내 글이 너무 가벼운 건 아닌지, 내가 무슨 목적으로 여기에 쓰는지 오늘은 생각해 보고 싶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첫눈을 맞으며 폴 칼라니티가 생각났었나 보다. 글을 쓴다는 것은 각기 다른 환경을 살아가는 개인이 살아있음을 세상을 향해 외치는 소리이다. 크게 메아리치는 소리도 있고, 묻히는 소리도 있고, 아예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을 것이다. 내 글은 거의 들리지 않는 소리이다. 그저 쓸 수 있고, 기록으로 남길 수 있음에 감사하다. 평범한 일상을 살기에 절절하고 의미 심장하게 써야 하는 이유를 찾기보다 "무엇을" 쓰는가에 집중해 순간의 생각과 감정에 솔직한 나의 모습을 적는다. 그런 이유로 오늘도 두서없는 글을 쓰고 있는가 보다. 부족한 글이나마 하루가 끝나기 전에 발행 버튼을 누르고 나면 쌓이는 일을 했다는 생각에 뿌듯하다. 나중에 다시 보면 부끄럽고 지우고 싶을지라도 지금은 살아있는 흔적을 남기는 중이다. 내일은 어떤 생각이 나를 찾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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