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산적 Nov 11. 2022

우리의 과정에 감사하려면

데프트와 DRX의 우승을 바라보며

원체 게임에 재능이 없었다. 중고등학생 때 종종 PC방을 가긴 했지만 게임 자체보다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오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었다. 군대에 있을 때 생활관 인원이 게임 중계방송을 볼 때면 도대체 무슨 재미로 이걸 보는 걸까 하는 의문을 가지곤 했다. 그렇게 나와 게임에는 좁혀지지 않는 벽이 있었다.


대학교 졸업 직전 마지막 3학점 이수를 위해 계절학기를 수강하던 그때의 겨울 방학은 정말 무료한 시간이었다. 더 이상 뒤이어질 새로운 학기를 준비하지 않아도 되었고 미국에서의 삶을 정리하는 데는 오직 몇 번의 은행과 학교 행정처 방문만이 필요했다. 전공강의를 모두 이수한 상황에서 부담이 덜한 수업이었기에 귀국까지 한 달 남짓한 그 시간 그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난생처음으로 리그 오브 레전드 게임을 시작했다. 늦은 나이에 재미를 맛본 게임이어서 스스로에게 느끼는 죄책감도 있었지만 내 또래 친구들에게 오랫동안 가장 큰 공통 관심사 중 하나였던 이 게임으로부터 더 이상 소외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적절한 만족감이 더 크게 다가왔다.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리그에 관심이 기울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군 시절 이해할 수 없다며 손사래를 쳤던 게임 중계방송을 챙겨보기 시작했다. 리그에서 뛰는 프로선수들은 하나같이 그 게임에 정점에 오른 괴물들이었다. 나는 감히 흉내도 낼 수 없는 경이로운 플레이에 놀라고 감탄을 하며 경기를 지켜봤다. 프로선수들은 괴물 같은 실력의 보유자들이기도 했지만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에 앳된 소년들이기도 했다. 그 놀라운 실력을 뽐내고도 인터뷰 자리에 서면 긴장을 하고 말을 더듬기도 하며 실력과는 상반되는 귀여운 모습을 자주 보였다. 그런 앳된 선수들 가운데 놀라운 실력과 더불어 조곤조곤 자신의 의견을 정확하게 전달하며 인간적으로 아주 성숙한 모습을 보이는 선수가 있었다. 그 선수를 응원하는 마음이 점점 커져갔고 다른 경기는 놓치더라도 그의 경기는 꼭 챙겨보았다. 그렇게 나는 데프트 선수의 열렬한 팬이 되어있었다.




올 시즌 그가 속한 팀은 준수한 멤버 구성으로 좋은 성적이 예상되었으나 최종 순위는 10팀 중 6위를 기록했다. 우여곡절 끝에 나서게 된 소위 롤드컵으로 불리는 세계대회 진출권이 걸린 선발전에서도 데프트의 소속팀 DRX가 목표를 달성하리라 예상하는 팬이나 전문가의 수는 많지 않았다. 소속팀에서 공개한 다큐멘터리 영상에서는 선발전을 앞두고 팀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데프트가 순간 스킵권이 있다면 그것을 사용해 이 순간이 빠르게 지났으면 한다는 말을 했다. 그가 느끼는 그 순간이 짓누르는 압박감이 얼마나 컸는지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어려울 것이라던 예상을 뒤엎고 DRX는 선발전 진출팀 중 가장 낮은 순위였음에도 롤드컵 티켓을 따내고야 말았다.


낮은 확률을 뚫고 진출한 롤드컵에는 훨씬 더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는 팀들이 줄을 이었다. 대회가 시작되기 전 데프트와 그의 소속팀은 냉정한 평가를 마주해야 했다. 나 역시 열렬히 응원했지만 우승을 바라기는 힘든 상황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데프트와 DRX에게 꿈같은 일이 일어났다. 대회 과정 중 믿기 어려울 만큼 빠르게 전력이 상승했고 우승후보로 점쳐지는 팀들을 차례로 격파하더니 그렇게도 열망하던 롤드컵 우승을 이루어냈다.


모든 경기에서 압도적인 승리로 이루어낸 우승이 아니었다. 오히려 조별리그나 토너먼트 세트에서 패배를 기록하거나 불리한 경기를 가까스로 역전해 승리를 한 경우가 더 많았다. 조별리그에서 한 차례 패배 후 진행했던 인터뷰에서 데프트는 패배를 하더라도 스스로 무너지지 않으면 앞으로의 경기에서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는 내용의 말을 전했다. 이 인터뷰는 이번 대회에 하나의 슬로건과 같이 자리하게 된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팬들에게 다가왔다.


순간을 외면하고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너무나 간절히 사용하고 싶다고 말했던 '순간 스킵권'이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변모하자 기적과 같은 우승이 그에게 다가왔다.




 "반집으로 바둑을 지게 되면 이 많은 수들이 다 뭐였나 싶었다. 작은 사활 다툼에서 이겨봤자 기어이 패싸움을 이겨봤자 결국 지게 된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하지만 반집으로라도 이겨보면 다른 세상이 보인다. 이 반집의 승부가 가능하게 상대의 집에 대항에 살아준 돌들이 고맙고 조금씩이라도 삭감에 들어간 한 수 한 수가 귀하기만 하다. 순간순간의 성실한 최선이 반집의 승리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순간을 놓친다는 건 전체를 놓고 패배하는 걸 의미한다. 당신은 언제부터 순간을 잃게 된 겁니까?"  

드라마 미생에서 나온 주인공 장그래의 독백이다.

 

우승 후 기자회견에서 간절히 원하던 롤드컵 우승이란 목표에 도달한 소감을 묻는 질문에 데프트는 "결과로는 딱히 별거 없는 거 같고 여기까지 오는 과정들이 너무 좋았던 것 같습니다"라고 답했다. 내가 정말 좋아하고 응원하는 이 선수가 과거 시즌들 말미에 좌절하고 눈물을 보이는 경우를 여러 차례 보았다. 시즌 중 보인 놀라운 플레이와 인터뷰 중 내뱉은 말을 기억하는 나는 그가 충분히 잘했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는 자신이 손에서 놓았던 그 순간들에 큰 미련을 가졌을 것이다. 우승 후 그의 인터뷰는 자신이 열망하던 그 결과가 비로소 자신의 과정을 빛나게 만들어 주었기에 할 수 있던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을 손에서 놓고 잃어서 결과에 닿지 못한 나는 오랫동안 나의 과정을 핑계 삼아 스스로를 위로했다. 원하는 것을 모두 성취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기에 열심을 다했던 과정으로 내가 놓았던 순간을 가리며 살아왔다. 이런 상황의 반복은 나를 정체되도록 했다. 잔인하고 안타깝지만 과정의 평가는 결과로 결정된다. 결과에 닿지 못한 아름답고 처절한 과정이 존재할 수도 있지만 목표를 이루어 내지 못한 과정은 스스로를 속이고 놓았던 순간순간을 왜곡한다. 데프트가 닿은 결론처럼 나의 과정이 나를 위로하는 수단을 넘어 감사함과 자랑스러움을 느끼며 빛나는 대상이 되었으면 한다.



당신을 응원하며 나를 돌아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데프트 선수


 


이전 13화 많이 베풀며 배려심이 없던 친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