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에게 가장 친한 친구가 하나 있다. 학창 시절부터 만난 친구였고 세월이 지나면서 나와 엄마 친구의 아들은 같은 해의 태어나 어릴 적부터 자주 보며 그 깊은 사이가 대를 이어서도 돈독히 유지되었다. 그 친구에게는 연년생의 형이 하나 있었는데 나는 그를 호형이라고 불렀다. 어릴 적 자주 만나 함께 놀던 때는 나보다 덩치도 컸고 겨우 한 살 차이가 매우 크게 느껴질 만큼 듬직한 형이었다. 그런 호형은 이른 나이에 근육병 진단을 받았다. 깊숙이 들어가면 그 속에서 다양한 종류로 나뉘겠지만 대략 내가 이해한 근육병은 신체 근력이 서서히 약해지면서 심장의 기능에 까지 영향을 주는 병으로 뚜렷한 완치방법이 없어 진행을 늦추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병은 같은 시간을 지나면서도 호형의 시간만은 빠르게 흐르도록 했다. 듬직했던 호형은 한해 한해 만날 때마다 작아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휠체어 없이는 이동이 어려웠으며 한참 이후에 만났을 때는 팔을 움직이는 일마저 힘겨워했다.
조기어학연수를 하러 말레이시아에 있던 1년가량을 호형네와 한집에 함께 살았다. 그 당시 호형은 이미 휠체어 생활을 하고 있었고 일반 휠체어를 전동휠체어로 교체하는 문제로 자신의 엄마와 꽤 자주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였다. 당시 나에게 휠체어는 아주 재밌는 장난감과 같았다. 호형이 바닥이나 침대에서 쉬고 있을 때면 나는 빈 휠체어에 앉아 열심히 바퀴를 굴리며 집안 복도를 질주했다. 그러고는 전동휠체어라는 더 재밌어 보이는 장난감이 생겼으면 좋겠다 하는 철없는 생각에 호형의 편을 들곤 했다. 우리 엄마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나에게 이모 같았던 호형의 엄마는 내가 신나게 휠체어를 타고 있는 모습과 전동휠체어 교체를 옹호하는 말을 들으며 나와 그 상황이 얼마나 야속하고 원망스러웠을까. 감히 그 마음이 짐작이 되지 않는다.
그 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오랜만에 귀국했던 여름 어느 날 나와 엄마는 KTX를 타고 대구역으로 향했다. 호형이 힘을 많이 잃어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었고 정해진 면회시간 15분 동안 아주 오랜만에 그를 다시 만났다. 병석에 누워있던 그가 웃으며 반겨주었다. 주어진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을 알았는지 서둘러 호형이 말을 꺼냈다.
"말레이시아에 있을 때 나한테 계란 던진 거 잘못했지?"
그가 내뱉은 말이 그 일을 떠올리게 했다. 함께 살며 나와 호형은 참 많이 싸웠다. 그날도 투닥거림을 하다 밥을 먹으러 식탁에 앉았는데 다시 말싸움을 하며 욱한 나는 숟가락에 얹혀 있던 메추리알을 그대로 호형 얼굴에 던져버렸다. 아주 야위고 힘을 많이 잃은 그 순간까지 그가 그날의 서운함을 갖고 살도록 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미안했고 아무리 어리고 철부지였던 시절에 나라지만 그때의 내가 참 많이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 만남을 마지막으로 내가 미국에 돌아간 그해 겨울 호형은 하늘로 떠났다.
오랫동안 호형이 견뎌온 괴로움은 나를 위로하는 수단이었다. 아픈 형을 보며 내 상황에 감사하며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여러 번 되새겼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비로소 건강하게 또 철없이 그 시간을 지나오며 무심코 했던 나의 말과 행동, 거기에 더해 가졌던 생각이 호형과 그의 가족을 참 많이 아프게 했다는 사실이 보였다. 위로는 괴로움의 시간을 겪는 이들에게 향해야 한다. 때로는 그것이 또 다른 상처가 될 수 있기에 위로를 전하는 일에 있어서 더 깊은 사려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그들이 받아야 할 위로를 나의 것인 마냥 갈취하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다면 이래도 되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어야 한다. 남의 괴로움을 거울삼아 내 상황에 감사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일은 그들에게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일 테니 말이다.
호형이 떠나며 나에게 주었던 이 마음이 조금은 더 보편적인 생각이 되길 소원한다.